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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문화 아카이빙 프로젝트

도봉 아키비스트가 기록하는 도봉의 인물과 공간

지역문화 아카이빙은 도봉이 품은 다양한 문화의 가능성과 지역 자원을 주민이 직접 탐색,
기록하고 구성하여 중요한 홍보 자산으로 공유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전태일길’이 생겼다. 전태일 열사의 꿈은 헛되지 않았다.

작성자 | 이혜경

   내 인생의 죽비 전태일 열사  죽비 같은 사람이 있다.   전태일 열사가 내게는 그런 분이다.   그와는 일면식도 없고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 그와 비슷한 부분도 없다. 그런데도 전태일이란 이름을 떠올리면 내 의식의 정수리를 죽비 하나가 툭 치는 느낌이다. 일상의 안락과 욕심만 챙기지 말고 이웃의 고통에도 귀를 기울이고 깨어있어라 말하는 듯하다.   스물세 살의 생을 던지며 외친 그의 절규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세상에 던져진 화두로 남아 있다. ▲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을 읽고 난 후 전태일 열사가 내 인생의 죽비가 되었다.  전태일 열사가 떠난 지 벌써 50년  2020년, 올해는 전태일 열사(1948~1970)가 세상을 떠난 지 50주기가 되는 해다. 전태일 열사를 기리는 많은 행사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그 나름 기억에 남는 것 몇 개가 있다.  노동계 인사 중 최초로 전태일 열사에게 무궁화훈장을 추서한 것이다. 무궁화훈장은 국민 복지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이에게 수여하는 국민훈장이다.  또 하나는 전태일 문패를 단 ‘전태일의 집’을 그의 고향인 대구 남산동에서 개관한 것이다. ‘전태일의 집’은 전태일 열사 가족이 문간방에 세를 들어 살았던 집으로 친구와 가족들이 오랜 기간 돈을 모아 매입했다. 그 집에 산 기간은 짧았지만 전태일 열사는 그때가 인생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한다.   그리고 도봉구에 ‘전태일길(ChunTaeil-gil)’이 생긴 것이다. 도봉구는 “스물셋의 젊음으로 온몸을 불사르며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쳐 한국 노동운동의 초석을 마련한 전태일 열사의 50주기를 기리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전태일 열사가 살았던 도봉구 쌍문동 208번지  도봉구 쌍문동에 ‘전태일길’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자 동네주민으로서 그곳을 꼭 가보아야겠다는 사명감이 솟았다. ‘전태일길’을 찾아가려고 검색해 보았다. 도로명주소상 ‘해등로 25길’ 구간으로 길이 279m 폭 15m 길이다. 전태일재단과 사전협의를 한 명예 도로명으로, 사용 기간은 5년이라고 나와 있었다. 영구적인 것은 아니어서 서운했다.    전태일 열사가 도봉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아한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의 짧은 생애에서 마지막에 살았던 곳이 바로 도봉구  쌍문동 208번지(현 56번지)이다. 1966년 그가 살던 남산의 판자촌 동네가 불이 나 철거가 되었다. 오갈 데가 없게 되어 살 곳을 찾아 흘러들어 오게 된 곳이 쌍문동이다. 그가 세상을 뜬 이후에도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동생들은 이곳에서 계속해서 거주했다. 당시 판자촌이었던 이곳은 1985년 재개발이 되어 아파트단지로 바뀌었다. 현재는 삼익세라믹아파트 112동이 그가 살던 집터다.   ‘전태일길’은 도봉구가 전태일 열사와의 이런 인연과 기억의 끈을 놓지 않고 만든 것이다. ▲ 쌍문동 208번지 판자촌은 아파트 단지가 되었고 전태열 열사가 살던 판자촌 집터는 쌍문동 삼익세라믹아파트 112동이 되었다.  ‘전태일 열사 옛 집터’ 표지판은 어디에  ‘전태일길’을 가기 전에 전태일 열사가 살았다는 곳인 삼익세라믹 112동부터 찾아갔다. 그 근처 어딘가에 집터 표지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갔는데 막상 112동 주변에는 보이질 않았다.   근처를 둘러보다 일하시고 계신 경비 아저씨께도 여쭈어 보고 지나가는 주민들에게도 여쭈어 보았지만 집터 표지판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계셨다.   마침 한 분이 아파트 후문 쪽을 가리키며 저 근방에 있었는데 요즘은 보이질 않는다고 하셨다. 있었는데 보이질 않다니, 그럼 없앴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전태일길’도 만든 도봉구에서 집터 표지판을 없애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후문 쪽으로 발길을 돌리며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당연히 아파트 안 어딘가에 세워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없었다. 아파트 후문을 나와서야 발견했다. 아파트 단지 내부에 전태일 열사 집터 안내판을 세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일까. 마음이 복잡해졌다.  집터 표지판은 창경초등학교 뒤 담벼락 모퉁이에 서 있었다. ▲ '전태일 열사 옛 집터' 표지판이 창경초등학교 뒤편 울타리에 서 있다.  전태일 열사와 창경초등학교의 동병상련  창경초등학교 가까이에 ‘전태일 열사의 옛집터’ 표지판이 있는 것이 동병상련의 인연처럼 느껴졌다. 전태일 열사가 살던 남산의 집이 불이 나 어쩔 수 없이 이곳 쌍문동에 와서 거처를 마련했듯이 창경초등학교도 원래 이곳에서 세워진 학교가 아니었다.  창경초등학교는 종로구 연건동에 있었다. 학교가 창경궁 맞은편에 있어서 창경초등학교다. 연건동을 떠나왔지만 학교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어떻게 이곳으로 왔어?”  “살고 있던 남산 판자촌에 불이 나서 이곳에 오게 되었어. 무허가 판자촌 지어 겨우 살았어. 너는?”  “난 창경궁 근처에서 살았어. 그런데 그 근처에 다른 초등학교가 들어오면서 밀려서 쌍문동으로 왔어. 내가 왔을 때는 이곳 쌍문동이 아파트 단지라 판자촌은 볼 수가 없었어.”  “너나 나나 밀리는 인생이었네. 내가 동대문에서 쌍문동까지 걸어올 때 창경궁 쪽으로 걸으며 너를 본 것도 같아.”  “그 먼 길을 걸었다고? 왜?  “여공들이 배가 고프다고 해서 풀빵 사주고 나면 차비가 없었어. 그래서 집까지 2시간 넘게 걸어갔지 뭐.”  이제는 서로 친숙해져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며 지내겠지. 길가에 덩그러니 서 있는 ‘전태일 열사 옛집터’ 표지판이 외롭지 않기 바라며 이런저런 상상을 해 본다. ▲ 창경초등학교. 종로구 연건동 창경궁 근처에 있던 학교가 쌍문동으로 이전해 왔다.  해등로 25길 ‘전태일길’  ‘전태일길’을 찾아가며 길을 묻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근방 어딘가에 있어 잘 찾을 듯했다. 또 하나는 모른다는 대답을 듣는 일이 슬펐기 때문이다. 집터 표지판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잊혀서는 안 될 사람이 잊히는 느낌이었다. ‘전태일길’을 물으며 또 그런 느낌을 맛보고 싶지 않았다.  삼익세라믹 아파트 정문에서 쌍문 한양아파트 방향으로 가면 ‘전태일길’이 있을 것 같았다. 내 예상은 맞았다. ‘전태일길’이라는 팻말이 ‘해등로 25길’ 도로명 이정표와 함께 신호등 기둥에 걸려 있었다.  ‘전태일길’은 쌍문동 한양2~5차아파트와 삼익세라믹아파트 단지 사이에 난 길이다. 279미터의 2차선 일직선 도로라 시작점에서 끝이 보였다. 인도로 천천히 걸었다.▲ ‘전태일길’ 이정표를 보며 ‘전태일길’ 구간을 걸었다. 오른쪽 사진이 ‘전태일길’이다.  아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늦가을의 바람이 제법 쌀쌀하였다. 장갑을 끼지 않고 갔더니 손도 곱았다. 전태일 열사는 차비가 없어 직장인 동대문에서 쌍문동까지 13킬로미터를 걸어 다녔다는데, 겨우 279미터를 걸으며 조금 춥다고 움츠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어깨와 허리를 폈다. 걸어가는 동안 전태일 열사를 위해 지었다는 ‘그날이 오면’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계속 흥얼거려졌다.한밤의 꿈은 아니리 / 오랜 고통 다한 후에 /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 한 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 아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이혜경 기록>

도봉옛길 '경흥대로'에서 뜻밖의 파랑새를 찾다.

작성자 | 오키씨

   호기심의 시작은 이랬다.   “옥희야, 우리 동네에 경흥대로라고 예전 조선시대 선비들이 도봉서원 갈 때 걸었던 길이 있대.”   갑자기 머릿속 시계가 거꾸로 돌기 시작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공부하는 게 즐거웠을까? 서원 가는 길엔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도봉서원에선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며칠을 묵었을까? 이렇게 시작한 호기심은 결국, 조선시대 경흥대로가 어디인지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지도 한 장과 책 한 권>  조선시대 옛길이고 현재 흔적이 남아있는지도 알 수가 없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 도봉문화원으로 문의를 했다. 도봉문화원 진현우 연구원이 현재 도봉구 관광안내도에 경흥대로 옛길을 표시해 주었고, ‘역사기록에 보이는 도봉서원’ 책자 한 권을 건네주었다.  “지도에 표시된 길은 조선시대 6대로 중 2대로인 경흥대로입니다. 경흥대로는 현재 도봉로가 생기기 전에 수도 한양과 한반도 동북면을 연결하는 길로 물자교류, 군사 출정, 유람로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간선도로의 역할을 했습니다. 도봉서원을 찾는 선비들은 보통 이 경흥대로를 따라 왔다가 현재 도봉동 부부약국 쪽에서 도봉산으로 들어갔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현재는 이 코스보다 도봉산역에서 도봉산으로 들어가는 루트가 많이 이용되지만, 부부약국 쪽이 예전 동네의 성황당이 있던 자리였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목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왼) 대동여지전도로 보는 경흥대로(출처:도봉문화원) (오) 도봉옛길 경흥대로(출처:도봉문화원)▲ 연구원이 건네준 책한권과 도봉여행 관광안내도에 경흥로를 표시한 지도  신경준이 집필한 『도로고(道路考)』에 따르면, 경흥로는 수도인 한성에서 두만강 하구에 있는 한반도의 최북단 어항(漁港) 서수라(西水羅)에 이른다고 한다. 지금의 행정구역 이름으로는 서울에서 의정부-양주-포천-철원을 지나 북한으로 이어지는 도로이다. 과거 금강산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고 하니, 조선시대에 풍류를 즐기고 글 좀 읽는다하는 선비들에겐 버킷리스트 같은 길이었으리라 짐작해본다. 통일이 된다면 육로로 금강산까지 아니, 유럽까지 이어질 수 있으니 그 의미가 대단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1972년 미아사거리에서 의정부를 잇는 왕복8차선의 ‘도봉로’가 생긴 이후 이면도로가 되었고, 물류나 유람로의 역할 대신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 터전으로서의 기능이 주가 된듯하다.▲ 경흥대로 옛길 조선선비들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걷기 여행길▲ 경흥대로 옛길 여정의 시작. 우이천로 24길  연구원이 지도에 표시해준 경흥대로는 현재 우이천로 24길에서 시작해 도봉산역(예전 다락원터)까지다. 갔던 길도 뒤돌아오면 헤매는 길치인지라, 도봉에서 태어나고 자라 40년 이상을 살고 있는 토박이 친구와 길을 나섰다. 우이천로 24길에서 시작해, 신창시장->쌍문골목시장-> 정의여고 사거리->방학천 문화예술거리->신도봉시장->도봉동 부부약국->지금은 터만 남아있는 도봉산의 도봉서원 터까지가 둘러 볼 여정이다. 6시간 이상은 걸릴 것 같은데, 조선시대 선비들은 어땠을까?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이제 호기심을 채우러 떠나본다. 텀블러에 따뜻한 레몬차를 담고, 운동화에 두꺼운 양말까지 장착한다.   <같은 길, 다른 사람들>  도봉옛길 경흥로에선 신창시장, 쌍문골목시장, 신도봉시장 등 재래시장을 만나게 된다. 길을 따라 물자가 이동하고 사람이 모일 테니 시장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 조선시대엔 주로 동북지방에서 오는 북어 등의 어물과 양반들의 소비재가 길을 따라 시장에 모였다고 한다. 시끌벅적 활기가 넘쳐났을 그 곳을, 후손들 또한 이렇게 이어가고 있었다.(왼)신창시장 (오)신창시장. 붕어빵으로 허기 달래기(왼) 응답하라1988 촬영지였던 쌍문동 골목시장 (오) 활기 넘치는 신도봉시장<그곳에 골목이 있었다>  쌍문 골목시장에서 방예리(방학천문화예술거리)까지 걷는 길엔, 오래전부터 경흥대로를 지키고 있는 몇몇 점포들과 골목길 ‘쌍문2동 오래오래 기억하 길“이 있다.  도봉구 보건소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구불구불 골목길 벽엔 파스텔 톤 꽃과 나무, 새와 풀이 가득이다. 이 골목의 집들을 자세히 보면 대문 앞에 두 개의 주소가 표시되어 있다. 벽에는 현재의 도로명 주소가 붙어있고, 우편함에는 지번 주소가 필기체로 대충 적혀 있다. 도로명 주소가 정착되기 전, 지번주소는 우편물과 택배들이 주인을 찾게 해 주는 이정표였다고 한다. 학교 가는 길이었고, 장보러 가는 길이었고, 바쁜 아침 출근길이었고, 누구에겐 풋풋한 만남의 길이었을 골목길이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나 또한 골목길에 대한 추억이 많아서일까?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고 있는 ‘기억되 길’이 왠지 위안을 주었다. 기억하려 노력해야만 과거는 추억이나 역사로 남는 것 같다. 많은 것이 빠르게 변하는 날들이라 이런 노력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왼) 쌍문2동 오래오래 기억하길 입구 (중) 오래오래 기억하 길 (오) 지번주소와 도로명주소(왼) 시가 있는 골목길 (중) 향기품은 골목길 (오) 삶의 터전 골목길▲ 골목길을 지키는 노력들. 날이 어두워지자 바닥에 불이 켜진다.<파랑새를 만나다>  걷다보니 한눈에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간판, 건물 몇몇이 눈에 띈다. 묵묵히 한자리에서 40년 이상을 지키고 있는 인상 좋으신 귀금속 전문점 정보당 사장님과 몇 마디 나눠보았다.  “오래만 했어요. 돈은 못벌구. 요즘은 예전 같지 않아요. 금값이 너무 비싸서 그야말로 ‘귀금속’이 됐어요.”  오랜 세월, 힘든 일은 없으셨냐고 물으니, 이리 답하신다.  “지금은 돌 반지도 거의 안하고, 반지나 목걸이 수리 그런거나 하는 거지 뭐. 나만 그런 거 아니고 다들 잘 안되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거지 뭐. 요즘은 담배도 팔고 그래요.”  지난 40년 세월을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사장님에게서, 태풍을 이겨내고 고요해진 눈빛을 소유한 어른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왼) 쌍문동 귀금속 전문점 정보당 (오) 고요한 눈빛이 인상깊은 정보당 사장님  과거엔 길을 걷다 출출하면 주막에 들렀을 테다. 현재의 우린 토박이 친구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먹었다던 자장면이 맛있는 ‘한중관’을 찾았다. 아담한 실내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자장면과 짬뽕을 주문하고는 한자리에서 오래 장사하신 비결이 무엇인지 여쭈어 보았다.  “장사가 아예 안 되면 옮기는데, 그냥저냥 운영이 되니까, 욕심이 없으니까 그냥 하는 거예요.”  “인건비 안 나가고, 집세 안 나가니까...하하하.”  30년 이상 중국집을 운영해온 사모님 얼굴에 그늘이 하나도 없다.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면 이토록 담담해지는가?   옛 조선 선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는 단순한 호기심에 출발한 여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찾은 건, 오랜 세월을 지나 욕심 없이 담담한 그 분들과, 변화와 개발의 과정 속에서도 오래되고 낡은 골목길의 가치를 기억하고 남겨주려는 애틋한 마음들이었다. 경흥대로 옛길에서 내가 만난 뜻밖의 소중한 파랑새들이다.(왼) 깔끔하고 단정한 한중관 내부 (오) 참 맛있었던 자장면과 짬뽕<어디에도 없음? 혹은 어디에나 있음!>  도봉옛길 경흥대로를 걷는 긴 여정 끝에 도봉서원을 찾는 선비들이 도봉산 쪽으로 방향을 바꿔 걸었을 거라고 추정된다는 부부약국을 찾아본다. 신도봉시장을 지나고 북서울 중학교를 지나 걷다보니, 멀리서도 눈에 띄는 은행나무 한그루가 있다.    그 길에 나무라곤 오직 딱 하나다. 갑자기 고대유물이라도 발견한 듯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성황당엔 마을을 수호하는 나무나 장승이 주로 세워져 있다는데, 은행나무는 바로 그 표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선비들도 이 나무를 보면 이제 도봉서원에 다 왔다는 안도감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을 거라고 짐작해 보며 웃음마저 흘렀다. ▲ 은행나무가 있는 부부약국. 멀리 도봉산이 한눈에 보인다.  하지만 이럴 수가! 그 은행나무는 부부약국을 운영하는 약사님이 47년 전에 직접 심은 거라고 한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갑자기 허탈해졌다. 순간 성황당 터를 꼭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민센터와 동네에 오래 살고 있는 토박이주민 그리고 택시기사님에게 수소문해보았다. 그렇게 성황당 터를 찾던 중, 도봉역 버스정류장에 선명하게 써져 있는 ‘성황당’이란 표지판을 보게 되었다. 지금껏 왜 몰랐을까? 관심이 없어서? 버스를 타지 않아서? 이렇게 우리 곁에 묵묵히 선명하게 남아있는데 말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과거 성황당이 있던 자리는, 도봉역(성황당)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행정사 송삼준 사무소 뒤쪽으로 걸어가면 되고, 도봉서원으로 가는 길은 부부약국에서 도봉산 쪽을 향하면 된다. 어디에도 없는 줄 알고 헤매었으나 결국 어디에나 있는 파랑새처럼, 성황당 터는 자세히 보지 않아 놓친 버스정류장 이정표 같은 거였다.   (왼) 성황당이라 표시된 도봉역 버스정류장 (오) 성황당 버스정류장<우리 곁에 오래 남기기>  조선시대 선비들이 도봉서원으로 가는 길이 궁금해서 걷기 시작했던 도봉옛길 경흥대로에서 나는 뜻밖의 파랑새들을 만났다. 그들은 이미 내 주변에 있던 이웃이었고, 이제야 알게 된 사연과 흔적들이었다. 가까이에서 늘 함께였던 소중한 것들을 작정하고 나선 여정을 통해서야 비로소 발견한 셈이다.  보물지도 찾듯 걷는 내내 안타까웠던 점은, 경흥로 옛길의 어떤 역사적 흔적이나 의미를 알리는 안내 하나 찾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흔한 이정표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경흥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티벳의 오체투지 길처럼 깨달음을 얻는 성지순례길은 아니다. 또 제주도의 올레길처럼 자연을 벗 삼아 힐링 하는 길도 아니다. 하지만 과거 조상들의 삶이 겹겹이 쌓여있는 길이었고, 한양에서 한반도 북쪽 끝 서수라에 이르는 길이자 금강산으로 가장 빠르게 통하는 길이었다고 한다. 그 의미를 담아 한번쯤은 걸어보고 싶은 ‘역사 체험 길’로 활성화시키면 어떨까?   작은 소망을 담아 이렇게 상상해 본다.   A씨는 경흥로에서 옛 지명을 잘 살린 이정표를 길잡이삼아 도봉산까지 여행 중이다. 걷는 여행자를 위한 스탬프 인증 수첩엔 이미 도장이 빼곡하다. 멀리 도봉산이 보이는 곳에 조선시대 주막카페가 있다. 주막에선 힙합이 흘러나오고, 한복 입은 청년이 음료를 주문받는다. 노천주막에서 A씨는 향기 가득한 꽃차를 마시며 한가로이 햇살을 즐긴다. 경흥로 안내책자엔 조선시대 코스튬을 한 ‘도보 여행자의 날’ 행사가 안내되어있다. 곧 다가올 ‘전통 거리 페스티벌’에도 눈길이 간다. 다음엔 어떤 여행을 할지 기대하며 도봉산으로 향하여 걷는다. <기록 오키씨>

도봉구 자취생의 공원 탐방기

작성자 | 심호정

    도봉구에 산 지 어느덧 4년이라는 시간이 되어간다. 이제는 고향만큼 애틋함이 느껴지는 나의 두 번째 고향 도봉구 쌍문동이다. 대학 진학으로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오게 된 나는, 처음 발들인 도심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 도심의 중심에 있는 학교와는 거리가 있는 곳으로 보금자리를 잡고 싶었다.    자취방을 알아볼 때 나에게는 정해놓은 조건이 있었다. 첫 번째 부동산이 저렴한 곳, 두 번째 소음이 없는 곳, 세 번째 정겨운 분위기, 네 번째 자연과 어우러진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서울의 외곽으로 오게 되었고, 그렇게 도봉구 쌍문동을 찾게 됐다. 쌍문동은 내가 생각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쌍문동에 살면서 가장 만족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근처에 공원이 많다는 것이다. 자연과 어우러져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곳. 우리 동네 근처에 있는 공원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 ‘초안산 근린공원’으로 향한다. ‘초안산 근린공원’은 창동에 속해있지만, 쌍문동에서도 금방 걸어갈 수 있는 곳에 있다. 내가 사는 근방에서 근린공원으로 가려면 쌍문역의 2번 출구에서 창동시장을 거쳐 가야 한다. 종종 이곳으로 운동을 하러 가는데 공원으로 향하는 길이 언제나 지루할 틈이 없다. 그 이유는 바로 근린공원으로 향하는 길이 요즘 젊은이들에게 핫한 ‘쌍리단 길’이기 때문이다. 가는 동안 곳곳의 예쁜 카페들과 아기자기한 소품샵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북적북적한 쌍리단 길을 지나 공원 입구에 다다르면 반려견 놀이터 표지판이 보인다. 공원 내에는 반려견들을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이곳에 오면 항상 귀여운 반려동물들을 마주칠 수 있다. 또한 축구장, 농구장과 테니스장이 있어서 각종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언제나 이곳을 채우고 있는 이들은 중고등 학생들이다.   저녁 무렵이 되면 운동을 위해 이곳에 모이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다. 추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나도 사람들 사이에 껴서 함께 운동장을 뛰거나 운동기구를 한다. 비록 지금은 마스크를 써야 하지만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시원한 공기가 정신을 맑아지게 한다.   운동은 하루 일상의 마무리와 같은 의식이었는데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아쉽게도 공원의 시설 대부분이 막혀있다. 텅텅 빈 운동장이 씁쓸하게만 느껴진다. 어서 빨리 활기로 가득 찬 공원이 되돌아오길 기다린다.   운동에는 제약이 있어도 공원에 찾아온 계절의 정취를 감상하기에는 제약이 없다. 첫 번째 코스인 근린공원운동장을 지나면 ‘들꽃향기원’이 있다.   원래 이곳은 무허가건물들과 불법쓰레기들로 지역의 경관을 해치던 곳이었다고 한다. 공원으로 재탄생된 결과 봄이나 여름에는 푸릇푸릇 피어난 들꽃들 사이에서 도심 속 자연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가끔 복잡한 고민이 있을 때는 향기원 벤치에 앉아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생각을 정리한다.  마지막으로 들르는 이곳은 ‘초안산 생태공원’이다. 이곳은 골프연습장이 될 뻔한 곳인데 10년이란 시간 동안 지역 주민들의 노력으로 공원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공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공원 내부에 우직하게 자리한 커다란 암반이다. 암반을 둘러 작은 연못이 조성되어 있는데 겨울이라 바짝 말라 있다. 봄여름에는 야생화들이 곳곳에 피어 있고 장미원에는 각양각색의 장미들이 핀다. 비가 오면 그 경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청초하다.   가끔 이곳에서는 공연하거나 영화 상영을 한다. 그때에는 작은 축제마당이 된다. 언제쯤 다시 활성화된 공원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루 빨리 마스크를 벗고 피톤치드를 마시며 자연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요즘은 숲과 역세권의 합성어로 ‘숲세권’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숲이나 산이 인접해 있어 자연 친화적이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는 주거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서울에 살면서 처음 들어본 말이다.   나는 태어나서 19년을 강원도 홍천이란 지역에서 살았고, 언제나 어디를 가든지 산과 강이 볼 수 있었다. 오히려 자연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서울에 오고 보니 자연이 간절해졌다.  높은 건물들과 언제나 꽉꽉 사람들로 낑겨서 타는 지하철은 나에게 자연을 갈구하게 했다. 비록 도시의 중심과는 조금 멀지만, 자연이 제공되는 도봉구는 나에게 힐링의 공간이다. 가족과 함께 살지 않아도 나의 본고장 홍천과 닮아있기에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언젠가 도봉구 쌍문동을 떠나야 할 때가 와도 이곳은 언제나 나의 제2 고향으로서 남을 것 같다. <기록 심호정>  

도봉역사문화길 (3) -천년 고찰길을 따라가는 도봉산행

작성자 | 송주영

   도봉(道峰)이라는 명칭은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도선국사가 ‘도를 닦는 곳의 봉우리’라는 뜻을 붙여 지었다고 합니다. 이름이 가진 뜻처럼 크고 넓은 산세를 가진 도봉산 곳곳엔 수양을 위한 사찰과 암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중 인도의 옛 이름인 천축국의 영축산과 비슷하다고 해서 지어진 ‘천축사’와 그 부속 암자를 탐방하려 합니다.  도봉역사문화길 중 하나인 천년 고찰 길을 다양하고 여유롭게 탐방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바위 밑에 기묘하게 자리한 불자들의 참선 도량인 만월암 방향의 길과, 옛 선인의 향기를 가득 품은 천년고찰 천축사 방향의 길입니다. 천축사 길에서는 그의 부속암자인 ‘석굴암’과, 고려 초에 창건된 ‘도봉사’를 볼 수 있습니다.   여러 사찰과 암자를 볼 수 있는 이번 탐방길에서는 사찰의 이곳저곳을 천천히 둘러보려 합니다. 가을의 절정, 단풍엔딩을 맞이하는 도봉산에서 비움의 아름다움을 마음에 담아보려 길을 나섭니다.   아침 해가 따뜻해지기 시작한 오전 10시, 141번 간선버스의 종점에 내려 도봉산 입구에 들어섭니다. 모든 계절이 아름답지만, 계절을 달리하며 천의 얼굴을 자랑하는 도봉산의 백미는 단연 늦가을입니다. 등산로를 따라 올라갈 때마다 길가의 바스락거리는 낙엽들은 듣기 좋은 소리를 냅니다. 곧 만나게 될 사찰의 편안함과 어울리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도봉산탐방지원센터를 지나 천축사 방향으로 약 1.6km 정도를 오르면 등산객들이 따뜻한 커피 한잔을 즐길 수 있는 도봉대피소가 나타납니다. 이곳에서 왼쪽의 천축사 방향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도봉대피소를 기준으로 오른쪽 길로 오른다면 지난 산행에 가보았던 만월암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면 호젓한 등산로가 나옵니다. 계곡의 물소리는 잦아들고, 고요한 주변의 공기가 머리를 맑게 만들어주는 듯 합니다. 마치 천연 공기청정기를 옆에 둔 느낌입니다. 왼쪽으로 보이는 골짜기에는 올여름 태풍으로 인해 쓰러진 나무들이 군데군데 보입니다. 그마저도 톰 소여의 놀이터처럼 보이는 이유는 신선한 공기를 마셔 풍성해진 상상력 때문일까요? ■ 엄격한 수행의 공간 ‘무문관(無門關)’이 있는 사찰 ‘천축사’   맑은 공기에 취해 10여 분 정도 산길을 오르면 천축사의 ‘일주문’과 사찰로 들어서는 돌계단을 볼 수 있습니다. 선명한 단청의 색상과 깨끗한 바닥이 등산객들을 반겨주는 것 같습니다. 굽이져있는 돌계단을 다 오르면 발치에 각각 이름을 두고 있는 수많은 불상을 볼 수 있습니다. 한기가 서리기 시작한 공기를 맞으며 단풍을 한 번, 불상을 한 번 바라봅니다. 여러 불상 속에서 우리네의 삶의 모습이 보이는 듯도 합니다.  불상에서 왼쪽으로 돌면 드디어 천축사의 전경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깎아지른 듯한 만장봉을 배경으로 소나무, 단풍나무, 유목 등이 울창한 수림을 이루고 있어 마치 닭이 계란을 품은 듯한 포근한 정경을 연출합니다. 계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천축사의 자리는 보는 이로 하여금 풍광 좋은 기도처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한참 풍경에 넋 놓고 보다가 돌아서면 왼쪽으로 삼층석탑이 나타납니다. 석탑 둘레에는 사람들의 소원과 바람을 담은 황금 나뭇잎이 줄줄이 달려 있습니다. 다들 무엇을 빌고 가는 걸까요? 몇몇 소원을 읽어보니 생각보다 작고 소박한 글귀에 마음이 따뜻해져서 이 정도 소원이면 들어줄 수 있겠다 싶어집니다.   대웅전 입구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니 사찰에서 생활하고 있는 견공 두 마리가 반갑게 꼬리를 흔듭니다. 산사의 견공들은 신기하게 늦가을을 담아둔 것처럼 눈빛도 고요함을 품고 있습니다.  천축사의 대웅전은 2004년 주지 현공 스님이 다시 지었습니다. 현재 2층은 대웅전, 1층은 종무소(절의 사무소)와 요사(신도들이 거처하는 집), 신도 휴게실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대웅전의 오른쪽 길을 따라 내려가면 천축사에서 눈여겨볼 건물인 ‘무문관(無門關)’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무문관은 약 60여 년 전에 세운 참선수행도량입니다. 면벽수행(面壁修行)을 위한 수행도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면벽수행(面壁修行)은 부처의 설산 6년 고행을 본받은 수행방법입니다. 벽을 마주 대하고 좌선하며, 수행도량에 한 번 들어가면 4년 또는 6년 동안은 바깥출입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수행 중 먹는 음식도 창구를 통하여 들여보내는 등 수행의 규범이 매우 엄격합니다. 현대의 고승 중에 이 무문관에서 수행한 이들이 많아 한국 불교계에서 무문관 수행을 최고로 알아주는데, 현재는 그 맥이 끊어져 수행하는 이들이 없다고 합니다.  무문관은 현재 템플스테이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장소이기도 해 템플스테이에 직접 참여해보고 싶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그저 무문관 아래의 경치만 둘러봅니다. 도봉산 계곡의 물줄기가 손에 잡힐 듯이 보여 무념무상으로 수행하기에 안성맞춤 일 거란 생각이 듭니다.  대웅전 바로 뒤에는 원통전(관세음보살과 신도들이 모셔 있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을 지나면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올렸다고 전해지는 ‘옥천석굴원’이 보입니다.   예전에 천축사는 옥천암(玉泉庵)이라 불렸는데, 이곳에서 나는 ‘석간수(石間水)’ 때문이었습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에서 샘솟은 물은 대웅전 앞 샘터까지 이어집니다. 지나가는 객들에게 시원함과 휴식을 선사했을 것 같습니다.   이외에도 천축사에는 신중전, 원통전, 독성각, 산신각 등이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소란스러워진 마음을 다스리기에 제격인 장소란 생각을 해봅니다. 다양하고 소박한 소원들이 가득한 천축사를 뒤로하고 그의 부속 암자인 석굴암을 보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섭니다.  석굴암을 가기 위해서는 ‘마당바위’를 거쳐 가야 합니다. 천축사 입구에서 마당바위까지 가는 길은 절대 녹록지 않은 곳입니다. 앞사람의 뒤꿈치만 바라보며 가파른 산길을 정신없이 오릅니다. 푸근한 듯한 도봉산에 이런 험지가 숨어있었다니요. 산의 새로운 모습을 본 듯합니다. 철봉 손잡이를 지팡이 삼아서 얼마나 올랐을까…. 무성한 나무숲이 끝나자마자 널따란 바위 지붕이 나타납니다. 갑자기 산 정상으로 순간이동을 한 기분이 들어 마냥 신기해집니다.  발아래 펼쳐진 풍경 속에서 잠시 숨을 돌린 뒤 석굴암을 가기 위해 신선봉 방향으로 향합니다. 마당바위에서 신선봉 방향으로 올라가다 나오는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100m 내려가면 석굴암이 나옵니다. 석굴암과 경찰산악구조대가 매우 근접한 거리에 있어서 찾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석굴암으로 향하는 돌계단은 무척 급경사여서 계단 옆의 봉을 잡고 천천히 올라가야 합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다 보면 형형색색 걸려 있는 불등(佛燈)이 눈에 들어옵니다. 맑은 소리를 내며 객들을 반기는 것 같습니다. ■ 가파른 산세 속 고요한 암자 ‘석굴암’  석굴암의 뒤편에는 선인봉의 거대한 바위가 보입니다. 석굴암은 그 바위 절벽의 좁은 공간에 있습니다. 커다란 바위에 ‘석굴암(石窟庵)’의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뒤쪽으로 선인봉의 하단부가 이어져 있습니다.  아담하고 고요하게 자리한 석굴암은 가파르고 많은 돌계단을 올라가야 볼 수 있을 정도로 탐방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습니다. 그래서 참선 수도하는 승려들이 많이 찾았던 곳일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 두 명이 지나갈 정도의 작은 마당을 지나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법당을 갈 수 있습니다. ‘만월보전’이라고 적혀 있는 법당 안에는 여러 탱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대웅전, 지장전, 산신각등 법당을 한곳에 모아 둔 것이 특징입니다.  만월보전 앞에 세워진 석등은 작고 오래돼 보입니다. 석등 옆에 서니 그제야 발밑의 오밀조밀한 암자 전체의 풍경이 보입니다. 깊은 산중에 있는 작고 오래된 석등이 늘 평안하고 은은하게 빛나는 시간을 보내라고 속삭이는 듯 합니다.   만월보전에서 내려와 석굴암 입구에 서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불전함 앞에서 합장을 마치고 마루에 앉아 계신 등산객이 보입니다.    “석굴암에 자주 올라오시나 봐요. 무슨 소원 비셨어요?”  “2주에 한 번 정도 올라와요. 소원이라기보다 지금처럼 건강하고 편안하게 해달라고 비는 거죠.  “이렇게 높은 암자까지 힘들게 올라오시는데 소원이 소박하신 것 같아요.”   “사람들이 지금처럼 사는 게 좋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아요. 지나고 보면 그때가 참 좋았지 후회하면서 그때는 그걸 복이라 생각 못하는 거지. 떵떵거리고 호령했던 사람도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리는 거 봐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작은 행복에 살지만 그런 일은 없잖아. 그런 게 좋은 거지. 사는 게 별거 없어요. 다 그래.”  우리가 바라는 행복이란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불전함 앞에서 소박한 기도를 전하고, 마음 편하게 보내는 일상을 행복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석굴암은 그런 사람들의 방문이 있어서 고요한 평안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심 없는 이야기를 전해주신 불자께 감사 인사를 건네고 마지막 탐방지인 도봉사로 향합니다. 호젓하고 가파른 돌계단과 낙엽이 그득하게 쌓인 산길이 끝날 때 즈음 오른쪽으로 서원교가 나타납니다.   서원교를 건너면 북한산 둘레길인 도봉옛길로 들어섭니다. 도봉사 앞을 지나는 도봉옛길은 숲에 포근히 둘러싸인 형태로 도심과 가깝지만, 숲속의 청정한 공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 가난한 자의 등불 하나, ‘빈자일등상’을 가진 ‘도봉사’   도봉사는 흥미로운 이야기와 전설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사찰입니다. 그 중 도봉사에 있는 ‘빈자일등상’ 탑의 전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가난한 자의 등불 하나’라는 뜻을 지닌 ‘빈자일등상’의 전설은 이렇습니다.  옛날 인도 사위국에 ‘난타’라는 가난한 여인이 구걸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사는 마을에 석가모니가 찾아오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의 방문에 앞다퉈 몰려가 공양과 등불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난타는 아주 적은 양의 기름으로 아주 적은 등불만을 밝힐 수 있는 처지였습니다. 갖은 고생을 해서 번 돈으로 기름장수를 찾아갔지만 적은 양의 기름은 팔지 않는다는 매몰찬 거절에 어려움도 겪습니다. 하지만 난타는 작은 등불이라도 밝혀 공양을 올리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기름 장수에게 100번이 넘는 절을 하고 사정을 해 기름을 얻습니다. 그렇게 얻은 기름으로 다른 사람들의 등불 사이에 자신의 작은 등불을 정성스럽게 놓습니다.  모두의 등불이 환하게 밝혀졌던 하루가 지나자, 모든 등불의 기름이 말라 하룻밤 사이에 죄다 꺼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난타가 올린 등불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밝고 힘차게 타올랐죠. 그 등불을 본 석가모니는 그녀의 사연을 전해 듣고 난타를 여자 승려인 비구니로 받아들여 제자로 삼게 됩니다. 물질의 풍요로움보다 소박하지만 진실된 정성이 더 소중하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호기심을 가득 안고 도봉사에 도착했으나 아쉽게도 코로나 시국이라 닫혀있어 경내를 볼 수 없었습니다. 특히 전설을 이야기해 주는 듯한 코끼리 상(부처의 법을 상징)과 등불위에 난타의 모습을 조각해 올린 독특한 모양의 빈자일등상을 볼 수 없어 무척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사찰이기에 다음을 기약하며 하산합니다.   천년 고찰길은 도봉대피소를 지나 천축사부터 탐방하는 것을 권합니다. 석굴암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이 매우 가파르고 험해서 초행길인 등산객은 천축사까지 탐방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로 인한 힘든 시기가 지나 아름다운 풍광 속 사찰과 암자들을 자유롭게 탐방 할 수 있기를 바라며 도봉산 역사문화길 기행을 마무리 지으려 합니다.   나무는 초록의 여름보다도 한해의 끝자락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처럼 우리 생의 최고의 한때도 뒤늦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떨어진 낙엽에서도 가을을 느낄 수 있고, 그 가을을 담고 있는 고찰과 암자의 편안한 고요함도 마음에 담을 수 있어서 이번 탐방은 행복했습니다.  지금도, 도봉산 천년 고찰은 정갈하고 맑은 숨 한 모금이 부족해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문을 열고 항상 기다립니다. <기록 송주영>

젊은 곳간 신창시장에서 경험하는 즐거운 장보기

작성자 | 슈리

   부쩍 추워진 날씨, 10개월이 넘게 이어지는 코로나19. 여러 가지 이유로 자주 하던 외식도 멈추고 집밥과 함께 집콕 생활이 이어지는 요즘이다.  텅텅 비어버린 냉장고를 채우기 위해 장바구니를 들고 신창시장으로 향했다.   사실 시장이 익숙한 나이는 아니다. 이미 어릴 때부터 대형 마트에서 카트를 끌며 장을 보는 것이 자연스러웠기에 시장은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만 가는 곳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젊은 사람이 시장에 가면 오히려 품질이 떨어지는 물건을 팔고, 바가지를 씌운다는 카더라를 듣고 오해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신창시장은 그런 나의 오해와 편견들을 깬 곳이다. 이곳 근처로 이사를 온 이후에는 대형 마트에 방문한 날이 가물가물하다. <2030도 자주 찾는 젊은 시장>▲ 신창시장 입구  시장 입구 커다란 전광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활기찬 시장 상인들과 손님의  모습이 영상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해마다 열리는 전통시장 축제 때의 영상으로 짐작된다. 축제는 시장 활성화를 위해 1년에 한 번 열리는데, 각종 할인 행사와 다채로운 공연, 어린이 손님을 위한 이벤트 등이 진행된다. 축제 기간에는 정말 발 디딜 틈이 없다.   아쉽게도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축제도 조금 간소화되었던 것 같다. 그래도 3만원 이상 장을 보면 5천원 시장 쿠폰을 주는 이벤트가 진행되어 인터넷 지역 카페에서는 큰 화제가 되었다. 신창시장이 젋은이들에게도 핫플레이스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다,<본격 장보기 스타트>  평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시장 안에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 평일 저녁 시장의 모습. 주말에는 사람이 많아 일부러 평일에 방문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집에 눈이 간다. 아는 맛이 더 무섭다. 매번 그냥 지나치질 못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지.’▲ 내 인생 맛집 중 하나. 시장에 가면 이 곳을 꼭 빼놓지 않고 간다.   “왕만두 고기 반, 김치 반이요!”  마음 같아서는 수제 고로케도 꽈배기도 다 쓸어가고 싶었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참았다. 만두만큼이나 인기가 많은 이 집 찹쌀 꽈배기. 5개가 단돈 2천원이라니... 애써 해온 다이어트를 한 방에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유혹적인 가격과 맛이다.  출출한 허기를 달랠 간식을 샀으니 이번에는 반찬거리를 사러 좀 더 시장 깊숙이 들어가 본다.▲ ‘게 섯거라!! 밥도둑~’ 센스있는 문구가 발길을 붙잡는다.   ‘밥도둑’이라고 써 붙인 문구가 재밌어서 가게 앞에 멈춰섰다.   “사장님! 양념게장은 얼마부터 살 수 있어요?”  “2만원해도 되고 만원어치만 달라고 하면 그만큼도 주고~”  혼자 자취하는 터라 그럼 만원어치만 달라고 했다. 새 비닐장갑을 끼고 집게로 정성스레 담아주시는 모습이 청결해 보였다. 1인 가구의 부담도, 위생에 대한 걱정도 내려놓을 수 있어 안심이 되었다. 게장을 담아주시는 동안 다른 반찬들을 구경하다가 결국 간장새우를 추가로 주문했다.  “새우 한 마리 서비스로 더 넣어줬어요!”  “앗, 저 카드결제인데 괜찮은가요?”  “아유 우리는 그런 거 상관 없어요~”  내가 신창시장에서 처음 장을 보았을 때 가장 놀랐던 점이 이거다. 거의 모든 상점에서 카드 결제가 된다는 것! 보통 시장하면 카드를 내미는 순간 인상을 찌푸리거나 현금을 강요한다는 생각에 카드가 익숙한 젊은층은 시장가는 게 두렵고 꺼려진다. 하지만 여기 상인분들은 카드를 받아도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는다. 카드 결제인데 덤까지 받아도 되는건가 지레 눈치가 보였는데, 반찬가게 사장님께서 소탈하게 웃으시는 모습에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카드 뿐만 아니라 큐알 결제도 가능한 스마트 시장>  그러고보니 상점마다 ‘카드 환영’ 외에도 ‘큐알 코드’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서울시 지역 화폐인 ‘제로 페이’를 스마트폰으로 결제할 수 있게 해두었다. ▲ 가게 입구마다 붙어있는 ‘제로 페이 큐알 코드’  처음에는 만두집에서 발견하고 “여긴 이런 것도 하네” 했는데, 이후 방문한 다른 반찬 가게도 과일 가게도 족발집도 모두 이 큐알 코드가 가게 입구에 잘 보이게 붙어 있었다. 스마트폰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 안성맞춤인 결제 시스템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젊은 곳간’이라는 홍보 슬로건처럼 정말 젊은 시장이라는 생각에 이 곳이 더 좋아졌다. <전통과 젊음이 공존하는 리얼 뉴트로 공간>  신창시장의 젊은 활기는 젊은 손님층에게도 있지만, 젊은 상인들에게서도 느껴진다. 특히 정육점을 운영하는 젊은 사장님들의 에너지는 처음 방문했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을 만큼 강렬했다.▲ 젊은 사장님이 운영하는 정육점의 모습  붉은 후드 유니폼을 입은 20대 혹은 3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사장님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불고기 6900원!”을 외치며 호객 행위를 하니 순식간에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젊은 사장님 특유의 싹싹함에 늘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나도 이 날 홀린 듯 고추장 불고기 한근을 단돈 5400원에 담아 왔다.  젊은 사장님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취향을 저격하는 상품들도 여럿 진열되어 눈길을 끈다.▲ 과일 가게에 요즘 유행인 ‘샤인 머스캣’이 등장했다.     과일 가게에 늘 흔하게 있던 사과, 단감, 배 옆으로 요즘 핫한 샤인 머스캣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대형 마트에서나 보던 이 신종 과일을 시장에서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심지어 마트보다 기본 5천원은 더 저렴한 탓에 냉큼 하나를 집어 들었다. 덕분에 장바구니가 아주 묵직해졌다.   양 손 가득 무겁게 장바구니를 든 모습을 보고 한 상인 분이 배달 서비스 이야기를 하신다. 올해 4월 시장 배달 앱 ‘놀장’이 출시되었단다. 무슨 뜻일까 찾아보니 ‘놀러와요, 시장’의 줄임말이다. 배달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 시장과 더 가까워질 기회가 하나 더 생겼다. 날이 더 추워지면 나도 한번 이용해봐야겠다.   이날 잔뜩 장을 보고도 카드 결제 내역은 4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아마 대형 마트였다면 배는 더 나왔을거다. 맛있는 음식, 저렴한 가격, 푸짐한 인심과 활기. 무엇보다도 젊은 세대의 취향을 고려한 상품들과,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춘 다양한 서비스들. 혁신적이면서도 친숙한 진정한 뉴트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 내가 매주 신창시장을 방문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텅 빈 냉장고를 채워 넣으며 일주일 뒤 다시 신창시장에 장보러 가는 날을 기다려본다.  <기록 슈리>

도봉구 주민의 삶을 돌아보다 (2) -양말 공장, 세상 밖으로 나오다(창2동 강대훈님의 삶)

작성자 | 정지실

   양말로 피운 꽃길  찬바람을 가르는 창2동 우이천변 가로수길. 그 사이에서 알록달록한 색과 모양으로 단장한 120여개의 나무 옷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짚이나 이엉으로 덮였던 나무 옷이 그래피티 니팅(Graffitiing:공공시설물에 털실로 뜬 덮개를 씌우는 친환경 거리 예술)으로 화려하게 변신한 것이다. 뜨개질로 만든 나무 옷들은 겨울철 추위와 병충해를 줄이고, 다양한 무늬와 색채로 도시 미관을 살린다.  ▲ 창2동 양말거리     나무 옷들은 지난 9월말 창2동 자치위원회 문화축제분과에서 마을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작업한 결과물로서, 손뜨개질 위에 양말목으로 만든 꽃을 장식한 것이라고 한다. 매년 봄에 개최되던 ‘벚꽃 축제’ 중 함께 실시되던 ‘양말거리 조성 사업’이 코로나로 인해 뒤늦게 진행된 것이다. 60여명이 넘는 마을 주민 분들의 기부와 한 땀 한 땀의 봉사로 이루어진 행사였다.     “우리 창동에 제일 유명하다고 하는 ‘벚꽃축제’ 있잖아요. 그것도 처음에는 조그맣게 시작했는데 지금은 엄청 커져 버렸어요. 이후에 주민들과 함께 ‘이번에는 양말거리도 우리 창동에 한번 만들어 보자’해서 2년 전부터 해오던 일들을 이렇게 자꾸 키워나가게 되었어요.”  그 중심에는 직접적인 도움을 주셨던 마을 주민 분들과 사업의 소재인 양말목을 공급해 주셨던 주민자치협의회 대표 강대훈 선생님이 계셨다. 그는 창2동 자치위원회에서 13년 이상 꾸준한 활동을 해 오신 잔뼈 굵은 주민이기도 했고, ‘대운섬유’ 공장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 창2동 주민자치협의회 회장 강대훈 선생님  양말 인생의 시작  선생님과 도봉구의 인연은 ‘양말’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야기는 4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척에게 일자리를 소개 받아 간 곳이 광진구에 있는 양말 공장이었다. 18세 소년의 ‘양말 인생’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울 생활은 쉽지 않았다. 당시에는 근로시간이 오전 8시에 시작해서 저녁 10시까지 풀타임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하루 온종일 밤낮없이 공장에서 생활한 셈이다. 지금이야 노조다 뭐다 해서 근로환경이 향상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한 달에 한 번 쉬면 잘 쉬었다고 하니 그 삶이 얼마나 고되었을지 미루어 짐작이 된다.   “그때는 뭐 육체적으로 힘들고 그랬지만 그래도 꿈은 있었어요. 내가 열심히 살면 나중에 집 장만도 하고, 공장이라도 한번 하고 싶다 그런 꿈이 있었어요.”   고된 노동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은 데는 같은 방을 쓰던 선배의 도움이 컸다고 선생님은 회상하셨다. 그 분은 기술을 알려주는 선배이자. 나쁜 길로 가지 않도록 이끌어 주신 스승님이셨다고 덧붙이셨다. 지금도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꼭 찾아뵙고 있다고 한다. 선생님의 성공을 밑받침 해준 것들에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노력과 꿈, 그리고 주변의 도움이 있었다.   양말 특구 ‘창동’   선생님이 창동에 오신 것은 23년 전쯤이다. 공장 임대료가 저렴한 곳을 찾아 성북구에서 창동으로 이주하셨다.   1960년대, 국가주도형 산업화전략이 진행되면서 도봉구 일대에는 미원이나 샘표간장 같은 굵직한 공장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80년대 말, 그 공장들이 속속 타 지역으로 이주를 했다. 그 자리에 아파트와 주택이 생겨나고 소규모의 공장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비교적 싼 건물 임대료 덕분에 공장 운영자들은 창동이나 방학동으로 들어와 공장을 운영했다고 한다. 선생님도 그 흐름을 타고 창동으로 오셨다.  ▲ 양말제조과정 (양말생산, 양말가공처리)   양말 공장은 제조 공정의 특징 때문에 더욱 밀집했다. 양말을 만드는 공정은 총3단계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원사 입고 후 필요한 원사를 편직기에 걸고 봉조작업(원통형으로 트여져 있는 양말 앞트임을 불편하지 않게 이어주는 작업. 초기에는 일일이 손작업을 거쳤음)을 한다. 이후 가공처리, 자수 및 부자재 세팅, 그리고 택 작업과 포장을 거친다. 이러한 단계별 과정이 각 공장 의 하청작업으로 맡겨져 있다. 때문에 공장들이 함께 모여 긴밀히 협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도봉구가 전국 양말 생산의 30~40%를 점유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창동에 양말 공장들이 밀집되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양말 공장은 모두 하나에요. 우리 도봉구에 만 해도 뭐 한 250 군데 정도 되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우리가 경쟁자이기 보다는 같이 가야 된다는 생각... 경쟁한다고 경쟁이 되는 게 아니에요. 양말 자체는 서로 협력하면서 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협동조합을 만든 것도 그런 의미에서 만든 것이에요.”  도봉구에는 현재 이들을 결합하는 두 가지의 협의체가 있는데 ‘중앙 양말 연합회’와 ‘양말 협동조합’이 그것이다. 과거 친목 도모 위주의 연합회에서 온라인으로의 새로운 판로와 방향을 모색하고자 만든 것이 최근의 ‘도봉구 양말 협동조합’이다. 강대훈 선생님은 그 조합의 대표다. 조합 대표로서 선생님의 바람은 앞으로 양말 생산이 더 자동화된 시스템으로 전환되는 것, 그리고 지역 주민을 위한 공간에서 ‘양말 콘텐츠’가 활약하는 것을 꼽으셨다. 미래에는 양말타운이나 양말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포부도 세우고 계신다고 귀띔해 주셨다.  창동 살이 ‘세상은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니다’  “한 10년 쯤 된 거 같아요. 우리는 생이 끝나면 집사람이나 저나 있는 거 다 사회에 환원하고 가야 되는 상황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마음을 많이 내려놓고 봉사 쪽으로 신경을 쓰고 있어요. ‘세상의 삶은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올 3월에 화재 피해를 입어 그 손해를 메우느라 동분서주 하는 와중에도, 선생님은 본인 일을 돌보는 데만 몰두하지 않으신다. 양말 조합 대표로서의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에 더해, 마을 일에도 본인 일처럼 앞장서고 계신다. 12년 전부터 다른 주민들과 함께 창2동에 주민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달라는 건의를 해왔었고, 수차례 노력한 결과 창림초등학교 앞과 창동시장 내에 주민을 위한 복합 공간 건립이 예정됐다. 희망했던 것보다는 규모도 작고, 위치 선정 등 개선해야 될 부분도 있다. 그러나 창2동 주민 한분 한분이 마을을 함께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이고, 이런 마음들이 함께 모여 조금씩 좋은 마을을 이루어 나간다고 생각하니 절로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 창2동 우이천변  “저는 여기 창2동에서 내 생이 끝날 때까지 살 거 같아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창동에 살면서 제일 좋은 것은 이웃 간에 서로 아껴 주는 마음이 있어요. 내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라며 본 풍경 같은.. 그런 게 창2동에는 아직까지 남아 있어요. 서울시 어느 마을을 가도 그런 모습은 찾기 힘들더라고요. 우리 창동에 오면 그런 모습이 있어서 여기서 계속 살 거예요.”  창동에서 계속 사실 계획이냐는 물음에 선생님이 남기신 말씀이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목장주가 되고 싶었던 어린 소년은 양말을 통해 창동까지 오게 되었다. 이곳에서 공장 운영자로, 협동조합 대표로, 자치위원회 회장으로 살아오셨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꿈보다 더 멋진 일들을 이루신 것은 아닐까. 나아가 더 많은 일들을 이루어내실 것이란 기대도 하게 된다. 여전히 많은 꿈과 포부를 품고 계시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시작할 때 하셨던 선생님의 말씀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저는 양말이 제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요.” <기록 정지실>

우이성당 고양이와 동네 사람들 (3) -렌, 토리와 박경창 씨

작성자 | 이진희

   사랑과 헌신의 나비효과. 우이성당 근처 주민들은 고양이 활동가로 이도미 씨(1편 소개) 덕분에 굶고 병들어 죽어가는 길고양이들의 수가 확연히 줄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마음에도 변화는 싹텄다. 동네 사람들은 비슷한 장소에 나타나는 고양이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마음을 열게 되었다.   동네 고양이들의 생활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약간의 인기척만 들려도 허겁지겁 도망가는 삶을 살지 않아도 괜찮게 된 것이다. 조금 더 담대한 성향의 고양이들은 맘에 드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눈 인사를 건네거나 뺨을 부비고 친근감을 표하기도 했다. 경창 씨 가족과 고양이 렌의 만남도 그렇게 시작됐다고 한다.   Q: 렌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요?  A: 2015년 겨울쯤이었던 것 같아요. 동네에 얼추 비슷하게 생긴 치즈색 고양이들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렌은 몸집이 많이 작아서 다른 고양이들과 달라 보였어요.   렌은 유독 저희 집 근처에 와서 울곤 했었어요. 특히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항상 같은 자리에 있어서 시선이 갔어요. 배고파하는 건가 싶어서 저희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밥을 주게 되었고 이따금씩 안보이면 마음이 철렁하더라고요.   렌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저희 마음속으로 들어왔어요. 처음엔 ‘나비야’, ‘야옹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부르다가 ‘렌’이라고 정식으로 이름도 붙여주면서 반려동물로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목걸이를 달아줬어요. 돌보는 가정이 있으니 함부로 해치거나 잡아가지 말라고요.   Q: 이도미씨와도 왕래가 있다고 들었어요. 도움을 받으신 게 있나요?  A: 저희 동네 길고양이를 입양한 분이라면 다 한 번쯤은 그 분 도움을 받지 않았을까 싶어요. 너무 고마운 분이시죠.   아무래도 저희는 고양이를 돌보고 키운 경험이 없다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모르는 것투성이였어요. 도미님이 길고양이를 돌보시는 걸 멀리서나마 보면서 좋은 일 하시는구나 알고는 있었는데, 크게 교류는 하지 않았었어요. 이렇게 새로운 이웃을 만나게 된 것도 다 렌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렌과 함께 하면서 도미님께 궁금한 걸 물어보면서 친분을 쌓게 된 것 같아요.   한번은 렌이 뭘 잘못 먹었는지 배탈이 심하게 난 적이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렌이 아직 사람을 많이 경계 하던 상태여서 동물병원에 데려가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도미님께 연락을 드렸는데 늦은 시간임에도 손수 약을 가져다 주셨어요. 덕분에 렌은 배앓이를 잘 넘겼네요. 도미님이 렌을 초창기부터 돌봐주셨던 분이어서 저도 과거의 렌 모습이나 특성이 궁금할 때 이것저것 여쭤보았었어요.   Q: 렌 입양 후 경창씨 가족이 달라진 점이 있을까요?  A: 저희 가족이 원래는 고양이에 대해 무덤덤했고 특히 아버지는 길 위의 동물이 집안을 기웃거리는 것에 대해서 강경하게 반대 하셨어요. 그런데 렌이 워낙 애교가 많아서, 어느새 아버지 마음도 다 녹였네요. 아버지가 이제는 손수 밥도 챙겨주시고, 렌이 안 보이면 제일 먼저 찾으세요.   요새 어머니 카톡에는 제 사진은 없고 전부 렌 사진 뿐이에요. 전에는 쑥스러움을 타는 제 성격 때문인지 가족 간의 살가운 대화가 많지 않았는데, 렌 사진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서로 대화도 늘어나게 됐어요. 이제 저희 가족에게 렌은 정말 아들 또는 형제 같은 존재가 된 것 같아요.   Q: 고양이를 키우게 되면서 이웃 간의 관계 변화도 있었나요?  A:  초반에는 조금 갈등이 있었어요. 이를테면 오래 키운 나무 밑에 고양이가 용변을 봐서 나무가 말라간다며 저희 렌을 콕 짚어서 탓하신 분이 있었어요. 또 고양이들 짝짓기 철이 왔을 때 바깥에서 들리는 날카로운 고양이 울음소리가 혹시 렌이 아닐까 마음 졸이기도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주위 분들이랑 잘 지내고 있어요. 렌과 함께 지내면서 주변 청소에 꽤 공을 들이고, 동네 분들에게 렌 이야기를 전하면서 음식을 나눠드리기도 했어요. 렌을 콕 짚어서 나무라셨던 분의 마음도 많이 누그러지셨어요. 대화를 자주 나누다 보니 예전보다 더 잘 지내게 된 것 같아요.  사실 저희 가족은 이 동네 토박이예요. 제가 유치원 때 이사 와서 30년 넘게 한 곳에서 살았으니까요. 그런데 이웃 분들과 두루 친한 어머니와 달리, 저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이웃분이라고 해도 먼저 말을 걸고 대화가 이뤄지는 일은 없었어요.   렌과 함께 하면서 변화가 생겼어요. 렌이 산책냥이여서 주로 집 바깥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거든요. 렌을 찾으러 나섰다가 고양이에게 관심을 보이시는 분이나 다른 반려동물을 키우는 분들을 만나 대화를 하게 되더라고요. 간단하게 고양이 장난감 같은 것도 선물하고 서로 정보도 나누고 했어요.  동네가 더욱 정감있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Q: 새로운 고양이도 둘째로 들이시게 되었네요?  A: 네, 저희 둘째 고양이 이름은 토리고요. 생긴 건 렌과 꼭 닮아 한 핏줄 같지만 정황상 둘이 가족 사이는 아닌 것 같아요. 렌이 혼자 외롭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제는 둘이 아웅다웅하는 모습이 너무 예뻐요.  토리는 태어난 지 3개월쯤 되었을 때 저희 집 1층 외부랑 닿아있는 창고에서 발견됐어요. 한참 사람에 대해 경계를 하더니 렌과 친해져서 저희 집으로 들어오게 됐네요. 집으로 한발 한발 들어오는 과정을 사진으로 남겨두었는데 볼 때마다 감동이에요. 토리는 암컷인데, 아기 고양이 특유의 귀여움 때문에 온 가족이 매력에 홀딱 빠져있어요.   Q: 렌과 토리를 키우면서 경창씨 생활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제가 김포에서 직장을 다니는데 쌍문동에서 매일 출퇴근하기는 먼 거리여서 직장 근처에 숙소를 잡게 되었어요. 그런데 고양이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거의 매번 주말마다 쌍문동 본가에 오고 있거든요. 그 덕분에 평소에 다소 서먹했던 아버지와도 자주 만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고 저와 동생의 관계도 더 돈독해 진 것 같아요.   길고양이를 입양한 이 동네 사람들처럼 저희 가족 역시 어떤 특별한 계획을 하고 입양을 한 것은 아니었어요. 지금은 렌과 토리가 저희 집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고, 고양이들이 없는 삶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같습니다.    Q: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을까요?  A: 저는 쌍문동에 거주하고 직장 다니는 평범한 30대 청년입니다. 처음에 제 얘기가 듣고 싶다고 하셨을 때 조금 어리둥절했습니다. 제가 뛰어난 업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왜 보자고 하실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렌과 토리의 이야기를 하면 된다고 해서 인터뷰를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별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삶 속에서 강렬한 행복감을 가져다 준 친구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렌과 토리는 예기치 않게 제 삶속으로 들어와서 저희 가족을 끈끈하게 만들어 주었고 더 나아가 이웃과 동네에 대한 좋은 기억까지 심어준 소중한 존재입니다.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은 분들이 있습니다. 저를 만나기 전까지 도미님 같은 분들이 길 고양이들의 고된 삶을 잘 지켜주셨기 때문에 제가 렌과 토리와 남은 삶을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한때 길 고양이 입양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했어요. 자연의 질서대로 살아가고 있는 고양이들에게 오히려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닌지 고민이 컸었습니다. 그때 길 고양이 입양 경험과 마음을 나눠준 동네 친구들에게 이 기회를 통해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저의 소중한 반려 고양이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저도 더 열심히 일하고 있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저희 우이성당 동네 분들도 코로나 시기 잘 극복하시고 더 행복해 지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낮은 자세로 생명을 위해 봉사하시는 모든 분들 정말 존경합니다.   우이성당에서 덕성여대 후문에 이르는 주택가. 언뜻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평범한 골목길. 만약 그곳에 발길이 닿게 된다면 따스한 햇볕아래 여유로이 누워 다가오는 사람 손길을 피하지 않는 고양이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경창씨처럼 고양이를 지켜보면서 미소 띠고 있는 주민들을 만난다면, 당신이 먼저 말을 건네 보아도 괜찮다. 고양이와 사람이 모두 따스한 동네. 정겨운 우리의 집. 쌍문동 우이성당 골목은 우리 모두에게 그런 곳으로 기억될 것이다. <기록 이진희>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어둠을 마주하며 빛으로 나아가는 ‘평화문화진지’

작성자 | 이혜경

   다크 투어리즘은, 전쟁과 학살 등 끔찍한 재난이 있었던 어두운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하여 떠나는 여행을 말한다. 블랙 투어리즘(Black Tourism), 그리프 투어리즘(Grief Tourism)이라고도 하며, ‘역사교훈여행’이라 일컫기도 한다.  도봉구에서 다크 투어리즘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 바로 ‘평화문화진지’다.▲ 입구에서 바라본 평화문화진지   어둠의 역사, 대전차방호시설이 세워지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 무장 게릴라 31명이 서울에 침투한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김신조 간첩 일당 청와대 피습사건이다. 다음해인 1969년 ‘서울 요새화’ 일환으로 도봉구에  대전차방호시설이 들어섰다. 한국전쟁 때 북한군 대전차 공격을 막지 못한 악몽이 서려 있던 곳이다.   흉물로 버려지다  1970년에는 방호벽 위에 2층에서 4층까지 아파트를 지었다. 적에게 군사시설을 노출시키지 않겠다는 위장술이었다. 유사시에는 아파트를 무너뜨려 적의 진입을 막겠다는 계산도 들어 있었다. 벙커가 5개였기에 아파트도 5동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병영처럼 군인들이 살았다. 그러다 일반 시민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그 아파트가 2004년 철거되었다. 노후화로 붕괴 가능성이 있다는 진단이 나왔기 때문이다. 아파트는 철거되었으나 대전차방호시설은 남았다. 군사시설이기에 철거가 불가능했다. 흉물로 방치되었고 우범지대가 되었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버려졌다. ▲ 대전차방호벽 위에 아파트가 세워졌다. 그 아파트가 철거된 뒤에는 흉물이 된 채 방호벽만 남았다. (제공 : 평화문화진지)  다섯 개 벙커의 변신   도봉구의 주민들이 나섰다. 2014년 7월에 시민추진단이 결성되었다. 흉물이 된 대전차방호벽을 더 이상 방치하지 말고 주민들을 위한 문화예술창작공간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역사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는 건물로 인정받아 2016년 ‘서울시 미래 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철거 대신 공간을 재생하기로 했다. 설계를 공모하고 건축에 들어가 2017년 10월 31일 개관하였다.    기존 벙커인 콘크리트 벽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벙커 앞에 덧댄 건물은 예술가와 주민들을 위한 공방, 전시 공간, 커뮤니티 공간으로 조성됐다. 5개의 벙커는 5개의 동 이름을 갖게 되었다. 1동 시민동, 2동 문화동, 3동 창작동, 4동 예술동, 5동 평화동이다.   ‘평화문화진지’라는 이름은 서울시온라인 투표로 정해졌다. ▲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평화문화진지. 1동 시민동의 팻말도 보인다.    전문 건축가들도 인정한 우수 건축물 ‘평화문화진지’  ‘평화문화진지’는 2018년 ‘제36회 서울시 우수 건축상’을 수상하였고, ‘서울을 바꾼 10개의 건축물’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기존 벙커의 콘크리트 벽을 남기면서 새로 추가한 공간은 나무(탄화목)를 외장재로 사용하였다. 도봉산, 수락산, 중랑천 같은 주변 공간으로 건물이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만들었다.  건축가의 아이디어가 빛나는 ‘중정’과 아쉬운 ‘지하통로’  건축가의 아이디어가 특히 빛나는 장소는 ‘중정(中庭 /Courtyard)’이다. ‘중정’은 한옥에서 볼 수 있는 건축양식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의 ‘ㅁ’자형 뜰을 말한다. ㄷ자형 벙커를 그대로 두면서 앞부분에 예술가들의 창작공간을 지어 ㅁ자형을 만들고 그 사이에 마련한 공간이다. 야외용 탁자와 의자가 있어 차 한 잔을 마시며 담소를 나눌 수 있다. 작가들의 작업실 뒷문과도 연결이 되어 있어 야외 작업실이나 전시장으로도 좋을 것 같다. 콘크리트 벙커의 삭막함 속에도 여유로움을 펼쳐준 건축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평화문화진지의 중정. 햇볕가리개를 설치하고 야외용 탁자와 의자를 비치했다. 해먹도 있다.   건축가가 아쉬워했던 것 중 하나가 뒤늦게 발견한 2동과 3동 사이의 ‘지하통로’다. 설계에 반영하기엔 늦어버려 손을 쓸 수 없었다 한다. 강화유리를 덮은 ‘지하통로’를 지나다니며 볼 수 있었다면, ‘평화문화진지’가 품고 있는 어둠의 역사가 더욱 실감났을 것이다.  평화광장과 베를린장벽  ‘평화문화진지’에서 유일하게 방호벽이 사라지고 앞뒤가 뚫린 공간이 있다. 건물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평화광장’이다. 바로 곁에 있는 ‘다락원체육공원’으로 드나들 수 있는 광장이자 통로이다.   단절의 상징인 벽이 사라진 공간에는 교류와 소통이 있다. 한반도의 남북은 언제 저런 모습이 될는지.▲ 평화광장은 이 건물에서 유일하게 방호벽이 없는 부분이다. 광장에는 아이들이 분필로 그리고 놀았던 흔적이 보인다.  남쪽 잔디밭에는 ‘베를린장벽’이 설치물처럼 서 있다. 한 조각처럼 이어져 있지만 자세히 보면 세 조각이다. 먼 독일에서 공수되어 오느라 장벽 위에는 조각마다 구멍이 두 개씩 뚫려있다.   ‘베를린장벽’을 기증한 분은 독일의 개인 사업가 엘마어 프로스트 씨다.  그는 ‘베를린장벽’을 기증하면서 "이 장벽이 통일을 계속해서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하길 바란다."고 했다.   독일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장벽’은 무너졌고 독일은 통일을 하였다. 우리는 여전히 무너뜨리지 못한 방호벽을 지니고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베를린장벽’은 이런 우리의 현실을 각인시키듯 자리를 잡고 있다.▲ 베를린장벽의 앞부분과 뒷부분. 평화광장 안쪽에 설치되어 있던 것을  잔디광장으로 이전했다. 사람들이 더 많이 볼 수 있게 배려한 듯.  ‘진지한 책방’에 들어가 진지하게 ‘평화문화진지’와 만나기  ‘진지한 책방’이란 팻말을 발견한다면 그냥 지나치지 마시라고 말하고 싶다. 궁서체의 진지한 책방일지 모른다고 겁먹지 마시고 그곳에 들르시길. 책꽂이에 꽂힌 책들에 잠시 눈길을 주다 오른쪽에 나 있는 복도 쪽으로 발길을 돌리기 바란다. 벙커 부분을 살려 만든 ‘상설전시관’이다.   ‘평화문화진지’의 역사가 글과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다. 북쪽 벽에는 총포를 발사하는 총구들이 보인다. 이곳이 벙커임을 실감나게 한다. 복도의 끝에서 롤스크린으로 동영상까지 본다면 ‘평화문화진지’를 그야말로 진지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 상설전시관은 진지한 책방 안에 있다. 양측 벽에 평화문화진지의 역사가 조선시대 다락원부터 상세하게 설명된 글과 사진이 있다. 북쪽을 향해 난 소총 저격 공간도 보인다.  ‘평화문화진지’를 빛나게 하는 문화 예술 활동   ‘평화문화진지’에는 입주 작가들이 있다. 그들은 연중 쉬지 않고 갖가지 작품 활동을 한다. 전시회, 공연, 퍼포먼스, 원데이 클래스 등으로 주민들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문화와 예술의 장을 열고 있다. 요즘은 이곳도 코로나 때문에 기획된 전시회조차 제대로 열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내가 찾아간 날은 딱 한 곳에서 전시회를 했다. 발열 체크와 인적 사항 기록을 하는 번거로움은 있었지만 반가운 마음에 들어갔다.   그림 전시회, 너 얼마만이냐.▲ 전시 중이라는 팻말을 보자 반가워 들어가 보았다. 못 보는 전시회는 홍보물을 챙기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평화문화진지’를 둘러보다 보면 앞뒤 벽에 벽화가 있다. 동네 골목에서 보는 아기자기한 벽화가 아니라 우리의 불편한 진실을 깨우치는 그림들이다. 심각한 기후변화를 경고하는 그림, 사람의 피부색은 서로 다를 뿐이지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그림, 답답하기 그지없는 코로나의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은 그림 등이 있다.  생각이 많아지는 그림들이라 한참을 쳐다보게 된다.▲ 평화문화진지 방호벽에 그려진 그림이다. 왼쪽은 제목이 ‘the days are coming’ 오른쪽 그림은 제목이 ‘그곳의 아이’이다.  보고 있으면 생각이 많아진다.  학 모양의 전망대와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옥상의 풍경   ‘평화문화진지’의 동쪽 끝에는 휘돌아 나가는 실개천 대신 20미터 높이의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의 모양은 열십자의 형태로 새가 날개를 펴고 나는 모습이다. 그 새는 도봉구의 상징 새인 학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전망대’를 오를 때는 학의 날개를 타고 올라가는 상상을 해도 좋을 듯하다. ‘전망대’에서 그야말로 확 트인 풍경을 본다. ‘창포원’의 숲과 ‘다락원체육공원’, 의정부 도로와 중랑천 등 주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을 형상화하였다는 전망대다. 전망대 아래에는 실물인 대전차와 장갑차가 전시되어 있다. 전망대로 올라가면 중랑천과 의정부로 가는 길도 보인다.  ‘옥상공원’은 ‘평화문화진지’의 백미다. 도봉산, 수락산, 북한산 등이 파노라마 사진처럼 펼쳐져 있어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아름답다. 250미터 길이의 긴 옥상을 걸어가면 7호선 전철이 한 편의 영화 장면처럼 눈앞에서 스쳐 지나가는 모습도 만날 수 있다.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이면 ‘다락원체육공원’의 잔디가 평화롭게 펼쳐져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 풍경들이 내 마음을 촉촉이 적신다.▲ 옥상의 중간에 이정표가 있다. 독도보다 더 가까운 평양과 금강산을 못 가보는 우리의 현실을 알려준다. 부모와 함께 옥상에 자전거를 끌고 온 어린 남자애는 지나가는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저 아이에게 평화문화진지는 어떻게 기억이 될까.  역설적인 공간 평화문화진지   ‘평화문화진지’는 역설적인 공간이다. 평화와 문화라는 이름을 붙여도 여전히 군사시설물이다. 벙커 부분은 국방부, 새로 만든 스튜디오 등은 서울시 소유다. 국방부 소유 부분은 언제라도 군사시설로 전환될 수 있게 빈 공간으로 남겨져 있다. 예술과 문화의 공간으로 만들어졌지만 분단의 긴장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 긴장의 끈은 언제나 놓을 수 있을까?▲ 평화문화진지의 전시회장이다. 평소에는 그림 등을 전시하는 문화 행사 장소이나 유사시에는 대전차(탱크)가 들어가는 벙커다. 창문은 대전차의 포신 발사 공간이다.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평화문화진지의 역설이 그대로 다가왔다.   긴 일직선 건물인 ‘평화문화진지’는 곧게 흐르는 한줄기 강물 같다. 긴장과 공포 대신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기를 바라며 ‘평화문화진지’를 둘러본다. ▲ 도봉산에서 흘러나온 한 줄기 강 같은 평화문화진지<기록 이혜경> 

중랑천에서 다락원공원까지 -노을 맛집을 찾아 떠나는 개집사의 자전거 여행

작성자 | 오키씨

 다락원 잔디광장에서 바라보는 도봉산  <5초 안에 영화 속으로 빠지게 되는 이상한 곳>  “5,4,3,2,1”  “빠아앙~~”   열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온다. 하늘은 아까부터 수줍은 듯 발갛게 물들어 있었고, 씩씩하게 달려가는 열차 뒤로 도봉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눈앞엔 고르게 잘 자란 잔디가 운동장을 덮고 있다. 왼쪽엔 과거 대전차방호시설로 쓰였던 벽이 이제 작가들의 멋진 벽화 전시장이 되어 서 있다. 여기는 개집사인 나와 우리집 반려견 콩순이가 즐겨 찾는 저녁노을 맛집, 다락원 공원이다.씩씩하게 달려오는 열차. 내겐 어릴 적 보았던 애니메이션 “은하철도999” 바로 그것이다.평화문화진지벽화  하얀 천막지붕이 드리워진 평상에서 반려견과 함께 이 풍경을 보고 있으면 살아 움직이는 영화를 보는 것 같다. 기차도 살아있고, 도봉산도 살아있고, 하늘도 잔디밭도 벽화도 살아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게 너무나 완벽하게 조화로워서 혹시 이곳이 영화 촬영장은 아닐까 하는 환상에 빠진다. 이곳에서 나는 어릴 적 보았던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를 자주 떠올린다. 애틋할 만큼 아름다운 일몰과 기차 소리 때문일까. 아날로그 감성이 깨어난다. (왼)영화관 의자 대신 하얀 천막이 근사한 평상, (오)살아있는 도봉산  <동∙행∙자전거: 동네에서 행복 찾는 자전거 여행>  ‘다락원(院)’은 조선시대 나랏일로 여행하는 관리들을 위해 도봉동 일대에 설치되었던 일종의 숙박 시설이었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은 시민 모두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체육공원이 되었고, 반려견도 동반 가능하다. 넓은 축구장과 실내 배드민턴장, 실내 테니스장, 게이트볼장 그리고 어린이를 위한 물놀이 시설이 있다. 지하철 1호선과 7호선 도봉산역에서 내리면 금방이다. 그럼에도 나는 주로 자전거를 이용한다. 도봉구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다락원까지, 반려견 콩순이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여정이 많기 때문이다. (왼)다락원 축구장. 도봉산과 수락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오)중랑천 자전거 도로. 페달을 천천히 밟을수록 많은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락원을 향한 여정의 출발 지점은 중랑천 상계교 아래. 도봉구청을 옆으로 끼고 노원교-상도교를 지나면 왼쪽에 누원초등학교가 있다. 이제 저 멀리 도봉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 더 가면 중랑천변에 농구코트가 있고, 계단으로 올라가면 우리의 ‘중간 정거장’ 창포원에 도착한다. (왼)반려견과 산책하기 좋은 창포원, (중)여름날 창포원, (오)모네의 정원을 닮은 창포원  창포원은 사계절이 아름다운 생태공원이다. 특히 봄이면 노랑꽃창포, 부처 붓꽃, 타레붓꽃, 범부채등 130여 종의 붓꽃 군락을 볼 수 있다. 한여름의 창포원은 ‘모네의 정원’을 생각나게 한다. 빛과 색채를 그림에 담았던 모네처럼, 수양버들의 녹음과 다채로운 꽃들의 색채가 여름밤 불꽃놀이처럼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가을엔 키보다 더 큰 억새가 물결친다. 그냥 가보면 안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꽃, 풀, 나무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창포원 입구에는 반려견 동반 시 배변처리와 목줄 착용에 관한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다. 오히려 안심이다. 이 표지판은 역설적으로 ‘반려견과 산책할 수 있어요’ 하고 친절하게 말해주는 가이드 같다. 그만큼 반려견과 동반할 수 있는 곳이 의외로 많지 않기 때문이랄까?   <강아지 코에서 불이 나요>  지금부터 우리 집 콩순이 코가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한다. 일단 흙냄새, 나무에 마킹한 다른 반려견 친구들 냄새부터 맡기 시작한다. 봄부터 여름까진 한창 피어있는 꽃창포와 붓꽃 향기를 맡았다. 요즈음엔 창포원을 물결치는 억새 냄새를 맡는다. 잔디 사이로 올라온 민들레와 황새냉이 냄새도 맡았고, 불쑥 불쑥 비집고 올라온 쑥과 쇠비름 냄새도 맡았다. 특히 낙엽이 지고 유기물이 생기기 시작하는 요즘, 콩순이 코는 냄새 맡느라 정신이 없다. 내가 보기엔 코에서 불이 날 지경이다. 그래도 이 녀석은 좋은가 보다. 코가 촉촉하다 못해 콧물 질질, 눈물도 질질이다. 습지원에서 나는 촉촉한 물 냄새와 흙 속에 살고 있는 벌레들 냄새까지 맡으며 창포원을 한 바퀴 산책한다. 강아지들에게 창포원은 천국이지 싶다.반려견과 산책하기 좋은 창포원  <개집사들의 저녁노을 맛집>   창포원의 생기를 듬뿍 즐긴 후, 평화문화진지의 장벽을 통과하면, 드디어 저녁노을 맛집 다락원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왼)아날로그 감성을 깨우는 다락원 잔디광장, (오)개집사라도 혹은 개집사가 아니라도 다락원의 저녁노을 맛집을 즐겨보자   너무 완벽해서 다른 이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공간. 도봉산의 기세가 압도적이어서 위대한 자연 앞에 인간으로서 겸손해지는 공간. 벽화의 그림마저 꿈틀거리는 것 같은 생명력이 있는 공간. 쉼 없이 돌아가는 기차바퀴 소리가 심장을 마구마구 뒤흔드는 공간. 아날로그적 감성이 살아 움직이는 공간. 이곳에서 난 오늘도 잠시 ‘은하철도 999’의 환상에 빠진다.   그 풍경 속에선 당신도 경이롭거나 낭만적인 환상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스름이 내릴 무렵 텀블러에 커피 한잔 담아 다락원을 향한 여정을 떠나보길 추천한다. 운동복 차림의 당신과 당신 곁을 따르는 반려견은 이미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들어가고 있을 테니까.<기록 오키씨>

도봉구의 새로운 예술아지트가 되길 바라!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작성자 | 심호정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하면서 나는 좀 더 많은 것을 경험해보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때마침 내가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서울에 사는 친척언니가 나를 삼청동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 데리고 간적이 있었다. 삼청동은 옛것과 신문물이 세련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매우 큰 미술관의 외관은 아름다웠으며 나에게 놀라움을 가져다주었다. 청소년은 무료관람이 가능했고, 성인 역시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질 좋은 전시를 관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나의 주말 아지트는 미술관이 되었다.   하지만 서울의 끝자락인 도봉구에 사는 나에게 안국역은 먼 곳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가량 나가야 하는 일정은 생각보다 지치는 여정이었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서 전시를 볼 순 없을까?' 하고 도봉구에 있는 미술관을 알아보다가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를 찾게 됐다.   ‘미술관’이 아니고 ‘레지던시’라는 낯선 명칭 때문에 처음엔 방문을 망설였다. 과연 일반인이 방문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고민하다가 작년에 처음 그곳을 방문했다.  망설였던 날들이 무색하게 그곳에선 전시가 진행됐었고, 전시가 막 끝난 시점이었다. 아쉬움에 발걸음을 돌리던 차에 관계자분이 내게 먼저 말을 걸어주셨다. 어떻게 오게 된 것이냐는 물음에 나는 이곳이 미술관이 아니냐는 질문부터 던졌다.  “미술관 맞아요.”  그 분은 그렇게 대답해주시며 창동레지던시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여긴 국립현대 미술관과 연계된 곳이에요. 지금은 입주 작가들의 전시가 끝나서, 다음 시즌에 찾아오셔야 할 것 같아요.”  친절한 설명과 함께 그분은 내게 국립현대미술관 입장티켓 까지 건네주셨다. 나와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의 첫 만남이었다. 우리 동네에도 미술관이 있었다!  창동레지던시는 한국 현대미술의 국제화를 위해 문화체육관광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운영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다. 2002년 개관하였으며 9개의 작업실과 프로젝트 팀2실, 2개의 전시실, 야외작업장과 아티스트 숙박 공간, 주방, 커뮤니티 실까지 갖추고 있다. 국제 교환 입주 프로그램을 통해 해외 유수 문화예술기관들과 파트너 십을 통해 작가의 상호교환입주기회를 제공하여 외국의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한다.   전시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새로운 전시 시작 소식을 듣자마자 창동레지던시를 방문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입주보고서2020』라는 제목으로 전시가 진행 중 이었다. 참여 작가는 국동완, 배인숙, 빠키 이렇게 총 세 분이었다. 아무래도 코로나로 인하여 이번에는 교환 프로그램을 운영하지 않는지 모두 한국 작가 분들이셨다.<하루의 진동>2020 배인숙   첫 번째로 마주한 작품은 배인숙 작가님의 <하루의 진동>이라는 설치미술 작품이었다. 바둑판같이 나열된 네모난 기계장치들 중 한곳에서 계속 추가 빠르게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아무도 그 소리가 그 수많은 기계장치 중 어느 한 곳에서 나는지 확인 할 수는 없다. 분명히 기계에서 나는 소리인데 눈을 감고 들어 보면 마치 파도의 소리와도 비슷했다. 기계음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지만 이상하게 안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순환적 리듬 규칙>,<불완전한 충의 형상>외 2020 빠키  두 번째 전시는 빠키 작가의 그래픽 페인팅들이다. 기하학적인 도형들이 구조화 되어있는 그림들이다. 사이키델릭(Psychedelic)한 분위기와 강렬한 색감이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다.<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2020 국동완  세 번째 작품은 국동완 작가의 <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 연작이다. 태아의 실제크기 대로 그린 형태에 작가의 무의식을 채워 넣은 그림이다. 무의식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작품은 그로테스크하면서 신비로운 느낌을 풍겼다.  전시 관람을 통해 한국에도 개성 있는 현대미술 작가 분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분들의 작품들을 직접보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내가 사는 도봉구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아쉬운 것이 있었다. 나는 전시 첫 날 방문을 했는데 관계자분들을 제외하고 관람객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동네 가까운 곳에 좋은 전시가 있는데도, 구민들에게는 전혀 홍보가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도봉구 기초의원이신 박진식의원님께서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가 미술계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지만 주민들과 소통과 교류가 활발하지 않은 점을 들어 이전 의견을 내놓으셨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참고:「지역 환경 고려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 이전 필요」 강북신문)  ‘도봉’, ‘창동’이라는 지역과 동떨어져 있는 미술관의 방향을 보시고 내놓은 의견 같았다. 직접 공간을 방문한 내가 느끼기에도 그랬다. 처음 미술관을 찾아왔을 당시에도 이런 곳에 미술관이 위치했다는 것이 의외였다. 미술관의 위치도 노인 분들이 많은 지역이었고, 미술관을 찾는 이들도 없었다.   하지만 미술관이 사라진다면 아쉬움이 클 것 같다. 나는 미술관의 이전보다 주민과 함께하는 프로그램 수를 늘려서 미술관과 주민의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창동레지던시는 프로그램으로 젊은 층을 도봉구로 끌어들이고 노인들에게도 예술문화의 체험을 제공했으면 한다. 다양한 세대가 함께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장이 늘어날 때 더욱 발전하는 예술아지트 도봉이 되지 않을까싶다.<기록 심호정>

도봉역사문화길 (2) -천년 고찰길을 따라가는 도봉산행

작성자 | 송주영

   도봉산은 예로부터 다양한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산입니다. 예와 풍류를 두루 갖춘 선비뿐 아니라, 참선을 위해 떠나온 불자들도 자주 찾은 산 중 하나입니다. 서울과 인접하면서도 크고 넓은 산세 때문에 곳곳에 자리한 암자에서 근현대의 수많은 고승이 수련했다고 전해집니다.   도봉산 천년 고찰길은 수행을 떠나온 불자들의 흔적을 담고 있는 길입니다. 의상대사의 자취가 서린 고찰부터 조선 후기 왕조의 이야기를 품은 사찰을 찾아가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늦가을의 고즈넉함이 가득한 도봉계곡을 따라 올라갑니다. 자연과 하나 된 사찰과 암자의 탐방길을 수행 길에 오른 여느 불자들처럼 걸어볼 참입니다.   141번 간선버스의 종점부터 산행을 시작합니다. 늦가을의 정취가 가득 담긴 도봉산 초입에 들어서면 들뜬 표정의 등산객들이 보입니다. 그들과 어울려 걷다 보면 어느새 도봉탐방지원센터 앞을 지나게 됩니다. 전날 내린 비 덕분에 수량이 풍부해진 계곡을 바라보며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오른쪽 천축사로 향합니다.  얼마 정도 올랐을까요? 오가는 등산객들이 주는 먹을거리에 익숙해진 산냥이 한 마리가 곁에 다가와 ‘그르륵’ 소리를 내며 아는 척을 합니다.  산냥이의 곰살맞은 인사를 뒤로 하고, 100m 정도 오르면 정겨운 나무계단이 나타납니다. 계단의 끝에 다다를 때쯤이면 곧게 뻗은 소나무와 어우러진 도봉대피소가 보입니다. 북한산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공원 전체의 산장을 대피소로 바꾸기 전까지 ‘도봉산장’으로 불리던 곳이었습니다. ▲ 도봉대피소(도봉산장)   이곳 1층에는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커피숍과 푸근한 미소로 등산객을 맞이하는 주인 할머니 한 분이 계십니다. 체력소모가 많은 등산객에게 커피의 달콤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감미로운 비타민입니다. 도봉대피소는 그런 의미에서 등산객들의 비타민 충전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주인 할머님의 따뜻한 배려와 손때 묻은 살림살이 그리고 나무로 만들어진 가구들로 가득한 정겨운 실내 분위기는 덤입니다.   “커피분쇄기가 낡아 보이는데 얼마나 된 거예요?”  “오래됐어. 나같이 늙어빠졌지 뭐. 그래도 커피는 잘 갈려서 나와. 이게 커피알 크게 한스푼 넣어서 갈면 딱 커피 두 잔이 나온다고.“  “여기 오랫동안 살고 계신 거예요?”  “73년도부터 살았으니까 거의 50년이 다 됐지. 내가 할아버지 따라서 서른여섯에 여기 와서 80세 할머니가 됐으니까 얼마나 오래 됐겠어. 우리 아들은 여기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녔어. 요즘 엄마들은 상상도 못할 일일거야.”  ”하루종일 혼자 보내기 무섭지 않으세요?“  ”무섭긴 내가 뭐가 무서워. 내가 뭐 누구한테 해코지했겠어, 돈을 많이 쌓아두고 있겠어. 가진 게 많아야 무서운 거지 도둑이 와도 가져갈 게 아무것도 없어.”   “여기 사시면서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으세요?”  “사람들도 하도 많이 거쳐 가서 기억에 남는 사람도 없는데 뭐, 요즘 사람들은 옛날 같은 느낌이 없어서 가끔은 서운한 마음이 들기는 해. 뭐든 욕심 없이 넉넉하게 살아야 편안한 건데…. 봄 가을에는 2층에 있는 등산학교에서 수업도 해. 아마 74년부터 시작했을 거야. 지금은 끝났으니 내년에 다시 수업하겠지. 요즘엔 코로나 때문에 사람은 많지 않더라고.“  “앞으로도 쭉 여기서 사시는 거죠?”  “그렇지. 먹을거나 생활용품은 아들이 가져다주니까 걱정 없고…, 살다 보니까 이젠 여기에서 살아야 되는 건가 보다 하고 사는 거지,”  할머니가 웃을 때마다 나타나는 얼굴의 고운 실주름과 욕심 없는 대답이 인생의 깊이를 느끼게 합니다. 넉넉한 산의 품에 안겨 인생의 늦가을을 맞이한 할머니의 삶이 편안하고 조용해 보여서 부럽다는 생각도 잠시 해봅니다. 안전하게 산행하라는 할머님의 따뜻한 배웅을 뒤로 하고 걸음을 재촉합니다.   도봉대피소에서 350m 정도를 걸어 올라가다 보면, 길가에 칼로 자른듯이 반듯한 모양의 ‘인절미바위’가 보입니다. 화강암의 일종인 인절미 바위는 박리작용(밤과 낮의 기온차이로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면서 생기는 현상)에 의해 풍화가 진행되는 바위라고 합니다. 자연현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모양입니다. 도봉산의 신령들이 등산객들의 허기라도 달래려 만들어 놓은 간식 같다는 상상을 잠깐 해봅니다.  인절미바위에서 150m 정도 올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석굴암, 오른쪽으로 만월암을 알려주는 예쁘고 정갈한 표지석이 보입니다. 만월암으로 향하는 길 군데군데에는 등이 달려 있습니다. 마치 파랑새가 길을 알려주는 옛 동화가 생각나는 탐방길입니다.   바위 글씨길을 따라 올랐던 지난 산행에 비교해 천년 고찰길의 산행은 조금 가파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숨을 고르면서 주위의 풍광을 둘러봅니다. 사람이 빚어내기 힘든 자연의 색을 볼수록 산행의 고단함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많은 등산객들이 돌계단을 오르내리며 계절마다 변화하는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에 매료되었을까요. 힘없이 떨어져 쌓여있는 나뭇잎들마저 암자의 한 부분인 것 같아서 벌써 마음이 설렙니다.   드디어, 400여 개의 가파른 계단 끝, 커다란 바위 밑에 기묘하게 자리한 만월암에 도착합니다.   만월암은 서울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조그만 석굴 암자입니다. 신라 문무왕 시절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커다란 바위가 지붕을 이루고 있고, 오른쪽 1개의 바위가 그를 받치는 기둥 역할을 하며, 그 사이에 조촐하게 공간이 생겨 조그만 자연산 동굴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등산로와 이정표가 있어서 찾기 쉽지만, 옛날에는 찾기 힘들 정도로 외진 곳입니다. 그러다 보니 불자들이 참선하기에 그만인 곳이라 오래전부터 ‘보덕굴’이라 불리는 참선 석굴도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도봉산에는 천축사를 비롯한 크고 작은 오랜 고찰이 많아, 절에 머무는 승려들이 수행장소를 어디로 택할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조용하고 구석져 있지만, 심신을 수련하는 곳으로 이곳만 한 곳이 있었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아주 예전엔 절이나 암자는 없었고, 그냥 참선을 위한 동굴이 전부였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경내에는 석굴 자리에 지은 만월보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산신각 등 건물 2동이 전부입니다. 생기가 서린 듯한 현판이 걸려있는 만월보전에는 백불(白佛)의 석불좌상이 있습니다. 원래 금동불(金銅佛)이었으나 근래에 들어 호분(胡粉, 착색력이 좋고, 색이 들뜨고 갈라지는 현상을 방지하고자, 예로부터 현재까지 널리 알려진 백색의 대표적 안료)을 씌워 백불(白佛)이 되었다고 합니다. 포근한 인상의 석불좌상은 약함(중생의 갖은 병을 고치는 약이 들어 있는 통)을 왼손에 들고 있어 그가 약사여래(藥師如來)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월암 석불좌상은 현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12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불사의 양식으로 미루어 볼 때, 대략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명문이 있는 조선후기 석불로서 매우 중요한 예라고 합니다.   만월보전 앞에는 샘터가 있습니다. 보통 사찰처럼 석조에 담긴 맑은 물이 아닌 수도꼭지로 물을 틀어서 마시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만월암을 거쳐 가는 지친 등산객들의 몸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소중한 존재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시고, 하산하기 전에 고개를 돌려 암자를 둘러 봅니다. 묵직하고 고요한 바위 밑에서 그 무게조차 가볍게 만들어주는 법당의 분위기가 깊은 산골 여염집처럼 편안하고 아늑하게 느껴집니다. 쉬었다 갈 수 있는 작은 툇마루와 석불좌상의 인자함이 경내를 감싸고 있어 돌계단을 오르느라 힘들었던 모든 순간이 가벼워집니다.  도봉산 탐방센터에서 만월암까지의 거리는 2.5km 정도 됩니다. 암자를 탐방하며 긴 시간 동안 소란스럽지 않은 산속에서 가진 걸 내려놓으며 수행했을 불자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이 쌓은 정갈함이 속세에서 도망쳐 온 이들이나 삶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이들의 고달픔을 달래주는 위로로 다가갔을 테지요.   천년 고찰 길의 산행은 글 한 편에 다 싣기에 아쉬움이 남는 길입니다. 비움의 끝자락, 늦가을이 가기 전 다시 한번 도봉산을 찾아보려 합니다. 고승들의 수행처 무문관을 거느린 천축사와, 도봉사를 탐방하며 마음의 쉼표를 찍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이들의 고달픔을 달래주고, 삶에 지친 발걸음을 위로해 주었던 천년고찰 산행에 벌써 설렙니다. <기록 송주영>

주민들이 사랑하는 산책로 -우이천의 사계절을 기록하다.

작성자 | 슈리

   주말 저녁, 저녁밥을 먹고 부른 배를 꺼트릴 겸 가벼운 옷차림으로 우이천 산책로로 향한다. 창동과 쌍문동에 사는 주민이라면 자주 지나는 작은 하천 길. 빙하 타고 내려온 아기공룡 둘리가 처음 발견되었다는 만화 속 그 장소. 우이천은 창동으로 이사 온 이후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이다. ▲ 한적한 우이천의 모습   졸졸 흐르는 하천 따라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조성되어 있고 곳곳에 운동 기구들이 놓여 있어 주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해 도심 속에서 자연을 느끼며 쉴 수 있는 공간, 우이천의 기록을 남겨본다.  <우이천의 봄>  우이천 벚꽃은 도봉구 주민들에게 이미 유명하다. 4월 초, 마을버스를 타고 우이천 옆을 지날 때면 흐드러진 벚꽃에 취해 무거운 출근길도 잠시 설레는 마법에 걸린다.▲ 우이천 벚꽃길의 모습. 올해 벚꽃은 유독 더 풍성했다.   이 길은 2011년 서울 봄 꽃길 100선 가운데 하나로 선정됐다고 한다. 우리 동네에 이렇게 예쁜 꽃길이 있다는 게 괜스레 자랑스럽다.   매해 열리는 우이천 벚꽃 축제를 기다렸는데,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축제가 전면 취소되었다. 벚꽃 축제 뿐만 아니다. 작년 5월 개최되어 주민들의 호응을 얻었던 등축제도 올해는 없어진 모양이다.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축제가 없다고 벚꽃 나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오며 가며 벚꽃을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한해였다. 마스크를 벗을 수는 없지만 벚꽃 나무 앞에서 셀카봉을 들고 사진을 찍는 다른 이들도 모두 같은 마음 아니었을까?▲ 주민들이 마스크를 쓴 채 벚꽃 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우이천의 여름>  올해 여름은 우이천을 방문하는 사람이 유난히 많았다. 이 또한 코로나19로 인한 여파였을 것이다. 실내 활동을 기피하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야외로 나갔다. 시원한 내천과 나무 그늘이 있는 우이천은 그런 야외 활동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나 또한 주말 저녁 친구와 함께 맥주 한 캔을 손에 들고 징검다리 앞 돌계단에 자리를 잡곤 했다. 돌계단에는 이미 친구 또는 연인과 함께 온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계단에 신발을 고이 벗어 놓고 맨발로 시냇물에 들어가 물장구를 치는 꼬마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이 듣기 좋다. 유난히 집콕이 많아 우울했던 올해, 아이들의 물장구 소리와 웃음소리는 큰 위로가 되었다. ▲우이천 징검다리 앞 돌계단에는 저녁이면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그래, 이게 사람 사는 곳이지.’    시원한 바람, 그보다 더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졸졸 흐르는 우이천 시냇물에 내 고민을 실어 보낸다.   <우이천의 가을>  가을은 유독 짧게 느껴지는 계절이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예쁘게 단풍이 드나보다 했는데 며칠 전 우르르 내린 비에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았다. 알록달록한 꽃과 나무가 자취를 감추어도, 우이천에는 다른 볼거리가 많아 아쉽지만은 않다. 그 중에서도 둘리 벽화길은 아이들에게는 즐거움을, 어른에게는 추억을 선사하는 곳이다. ▲ 둘리 벽화의 모습. 만화 속 명장면이 그려져 있다.    소개 표지판을 통해 만화 속 둘리가 처음 발견된 하천이 우이천이라는 것을 알았을 땐 정말 신기했다. 만화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연결되어있는 느낌이랄까. 둘리와 그 친구들의 익살스런 모습이 그려진 벽화를 보면서 어린 시절 본 ‘아기공룡 둘리’를 떠올려 본다. ▲ 둘리와 친구들이 우이천을 바라보고 있다.   <우이천의 겨울>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패딩을 껴입은 사람들처럼 우이천 나무들도 털실 옷을 입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 벚꽃나무 그래피티 니팅  ‘누가 이렇게 예쁘게 나무에 옷을 입혔을까?’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양말거리 조성 및 벚꽃나무 그래피티 니팅’이라 적힌 현수막이 보였다. 창2동 주민자치회에서 자발적 참여로 진행한 벚꽃나무 옷 입히기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그냥 털실 옷을 입은 게 아니라 털실로 벚꽃을 만들어 잔뜩 달아놨다. 봄 벚꽃은 너무 짧아 늘 아쉬웠는데 덕분에 올해는 겨울에도 아름다운 벚꽃을 볼 수 있게 됐다.   ▲ 그래피티 니팅에는 5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힐링 산책로>  올해는 유례없는 감염병으로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변한 해였다. 소규모 가게들이 문을 닫아 없어지고, 우리를 즐겁게 하던 행사와 축제들이 없어지고, 얼굴의 반이 마스크로 가려져 없어지고... 하지만 우이천 산책로는 늘 그 자리에 있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들도, 평상에서 장기를 두는 어르신들도, 징검다리를 건너는 아이들도 모두 우이천에서 저마다의 방법으로 힐링 타임을 즐기고 있다. <기록 슈리>

헌책방 '외갓집에 가자' -작은 도서관 탐방기

작성자 | 정지실

   마을버스 01번을 타고 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쌍문 마당의 너른 모래밭이 펼쳐진다. 포크레인과 공사장 소음, 먼지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축제와 행사가 없을 때에는 동네 공원의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한다. 뒤편에는 나선형 모양의 ‘키친 가든’이란 이름의 도시공원 준비도 한창이었다.쌍문1동 마을마당  그 옆으로 ‘도봉구 우이천로 44길’의 좁은 골목길이 시작된다. 그곳에는 여성 안심 거리를 알리는 시트지들이 롤리팝 마냥 여기저기서 전봇대를 휘감고 있었다. LED 폐쇄회로와 비상벨, 각종 경고 문구들을 보고 있자니 시원했던 가을바람도 어쩐지 조금 스산하게 느껴졌다.  여성안심 쌍문모람(사람이 모이는)길  목적지인 작은 도서관을 찾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까닭에 만복이 온다는 계단 끄트머리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계단 꼭대기에 올라서니 동네의 모습과 산세가 한눈에 펼쳐 보인다. 왜 만복인지 알 것도 같다. 밑으로는 도봉산 진경이 그려져 있는 벽화와 감나무 밑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고양이도 보였다. 손님이 오시면 7가지 보물을 대접한다는 희망쟁반, 감나무, 희망슈퍼, 텃밭, 계단, 빗물 저장통들이 어렵사리 눈에 들어왔다. 숨은그림찾기마냥 제법 난이도가 있는 골목이다. 그냥 스쳐 지나가면 모를 후미진 골목 사이로, 주민들의 일상과 그 간의 노력들이 보이는 듯 했다. 도봉구 쌍문동 '희망 골목길' (주민주도 골목길 가꾸기)  골목을 한참 헤매고도 번지수를 찾을 수 없어, 결국 집 안에서 작업을 하시던 분들께 여쭈어보았다. 맞은편 집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며 문 밖까지 나오셔서 내가 찾는 곳을 일러주셨다. 그제야 번지수 빠진 주소지들이 얼굴을 내보이기 시작했고 스러져 가는 모양새의 붉고 낮은 담벼락을 찾을 수 있었다. 이내 한 눈에 들어온 것은 도서관 간판과 소담하고 하얀 문이었다. 연락처를 찾기가 힘들어 휴관일지도 모른다는 어둑한 불안감은 실내를 비추던 환한 주황색 조명 빛으로 금세 녹아내려 버렸다.헌책방&작은도서관 '외갓집에 가자'(우이천로44길 26)  ‘외갓집에 가자’는 이렇게 자그마한 도서관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만큼 아주 작은 도서관이었다. 작은 동화 속 세상으로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방학 때면 외할머니댁에 가서 모기향 하나 피워놓고 밤새도록 할머니 무릎 위에서 들었던 그 이야기들이 금방이라도 어느 틈새에서 툭 하고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도서관은 오래된 주택 반지하에 있었다. 실내로 들어서니 코로나 때문인지 이용객은 아무도 없었고, 운영자이신 신경애 선생님이 홀로 반겨 주었다. 작은 탁자와 낮은 의자에 노트와 필기도구를 내려놓으시고 어디서 왔느냐 물어 오신다. 짧은 통성명을 한 뒤 인터뷰를 청했으나 그간의 수많은 인터뷰 때문인지 먼저 손사래를 치신다. '외갓집에 가자' 외관  신경애 선생님은 친정 어머님이 사셨던 이곳을 통해 아이들에게 외가집 같은 곳을 마련해주고 싶으셨다고 한다. 비치되어 있는 책들은 주로 선생님이 그간 읽어 오셨던 손때 묻은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2018년 헌책방으로 문을 열었으나 보유 도서가 차차 늘어나면서 작은 도서관으로서의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란다. 책등에 청구기호 라벨이 붙은 것은 대출용으로 하고 있고, 이 밖의 것은 판매용이라고 한다.   선생님은 예전에 청소년시설의 책임을 맡아 일을 한 적이 있으셨기 때문에 그간의 경험을 살려 책을 통한 소통의 공간으로 작은 도서관을 시작하시게 됐다고 한다. 책방 2층에는 시 공부를 통해 사람들과 현대 시를 감상하거나 창작 공부를 하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고,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에는 목요포럼을 통해 정기적인 독서 토론의 장도 열고 있다. 앞으로 시니어들을 위한 공간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짧은 대화를 나눈 뒤 조용히 도서관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도서관은 선생님처럼 간결하고 깔끔했다. 서가가 그동안 하나가 더 늘어 이용자들이 늘어져 편히 읽을 수 있는 형편은 안 되었다. 대신 등을 맞대고 읽을 수 있는 만큼의 최소한의 공간이 허락되었기 때문에 타인을 위해서는 뭔가 소곤소곤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걸음걸이 또한 사뿐사뿐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전체를 둘러보니 우선 헌책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맞은편 서가에는 사회과학이며 철학책들도 보이고,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책들도 있었다.   서가를 바라보는 자리에는 액자 하나가 있었다. ‘志山心水(지산심수)’. ‘뜻은 산같이 마음은 물처럼 살자’라는 의미로 선생님 댁의 오랜 가훈이라고 한다. 이 도서관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어주는 문장이었다.작은 도서관 '외갓집에 가자' 내부  그 밑에는 선생님이 그동안 읽어 오셨던 책들과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각각의 칸에는 선생님의 흔적이 배어 있었고 그간의 삶을 보여주는 소박한 소품들도 있었다. 잠시 내가 작은 도서관을 꾸민다면 어떻게 할까 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베스트셀러가 난무하고 소비 상품이 즐비한 대형서점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자신만의 색이 담긴 아주 작고 작은 도서관... 이곳의 이름 때문이었을까? 코로나가 지나간 삭막한 도시 속에서도 할머니의 손길에 위안을 받은 느낌이었다. 이런 도서관이 동네에 있다고 생각하니, 언제든 달려가 응석을 부리고 싶은 외갓집을 지척에 둔 것 같아 훈훈한 마음으로 발길을 되돌릴 수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낮은 담벼락에서 감을 따고 계신 아주머니와 아저씨를 만나 감 세 알을 선물로 받았다. 쌍수교 다리 위에서는 짐을 끌고 가시던 힘든 할머니를 친절히 도와드리는 남학생들도 발견했다. 가을 선물을 듬뿍 받은 기분이 들었다.<기록 정지실>

우이성당 고양이와 동네 사람들 (2) -치킨, 두호네 이인성 씨

작성자 | 이진희

   쌍문동은 서울시에서 중장년층과 노년층 인구 비중이 높은 지역 중 하나이다. 젊은이들이 학교에 가고 회사에 가느라 낮 동안 동네가 텅텅 비어버리는 다른 지역과 달리, 우이성당 근처 골목길은 낮에도 여전히 온기가 흐르는 동네이다. 골목에 모인 이들의 대화 속엔 세월의 지혜가 녹아있다.  우이성당 근처 골목길 주민들은 활기찬 낮 시간을 보낸다. 담벼락과 화단에서 정성스럽게 가꾼 화초에 물을 주고, 고추와 생선 같은 것을 볕 아래 말리며 일상을 채워나간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이전에는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근황과 안부를 묻는 풍경이 펼쳐지곤 했다.   갓 노년기에 접어든 1인 가구 이인성 씨는 쌍문동이 가진 낮 풍경이 너무 좋아 이주를 결심하게 됐다고 한다.  “보통 서울이면 삭막한 도시를 떠올리기 쉽잖아요? 전에 살던 다른 구 원룸은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몰랐어요. 그냥, 물 트는 소리, TV 소리가 나면 이제 사람이 들어왔나 보다 했었지. 우이 성당쪽에 사는 친한 지인이 빈 방이 있다고 해서 별 기대 없이 보러 왔는데,  동네 분위기에 이끌려서 계약하게 되었어요. 분명 서울인데 서울 같지 않고 고향에서 느꼈었던 편안한 느낌이 들더라고.”   Q: 쌍문동에 사는 동안에도 동네가 계속 좋으셨어요?  A: 그렇죠. 집주인 사정으로 지금은 도봉동 쪽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마음 같아서는 그곳에 내내 살고 싶었어요. 5년 넘게 살기도 했고, 이웃들도 참 넉넉한 인심이었어. 그렇다 보니 옆집 뒷집 앞집이랑 다 사이가 좋았어요. 명절 때면 혼자 산다고 전이며, 갖은 나물 무침, 과일들을 여러 집에서 챙겨주더라고. 서울에 그런 동네가 또 어딨겠어? 말하는 지금도 생각나고 그립네.  Q: 지금 키우시는 고양이도 우이성당 골목길에 살던 고양이라고 하던데, 어떻게 키우게 되신 건가요?   A: 요새 젊은 사람들은 고양이 참 좋아한다고 하던데. 사실 우리 또래들은 강아지가 좋지, 고양이는 무서워하거나 싫어하는 경우가 많아요. 나도 평생 강아지만 두 마리 키워봤지. 고양이는 모르기도 하고 짝짓기 시즌이 되면 울어 재끼는 통에 밤에 잠자기도 힘들게 해서 좋아하지 않았었어. 그런데 두호를 만나게 되면서 생각이 많이 달라졌지.  나도 처음엔 가족이 있었는데 이혼하고 자녀들은 다 분가시키면서 혼자가 됐어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노년의 삶도 시작하게 됐는데, 때때로 적적한 마음이 찾아오더라고.   2~3시면 퇴근을 하는데, 그날도 일을 마치고 조금 기분이 그래서 멍하니 창문 밖을 보고 있었을 때였어요. 지나가던 누런색 고양이랑 눈이 마주쳤는데 피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더라고. 배가 고픈가? 해서 집에 있던 고기를 조금 썰어줬는데, 피하지도 않고 허겁지겁 잘 먹었어.   고 녀석, 밥 챙겨주는 사람 만났다고 생각했는지 그 이후로 자주 오더라고. 그렇게 자꾸 보니 정도 들고, 내가 매일 고기 주기엔 형편이 안되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물어봐서 사료 한 포대도 사게 됐어요. 매일 보이는 건 아니지만 빈 밥그릇을 보면 잘 먹고 갔구나 해서 마음이 참 좋았어. ▲ 두호  Q:  단순히 밥을 챙겨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집 안까지 고양이들을 들이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A: 나는 고양이와 집안에서 함께 지내는 건 반대인 사람이었어요. 이리저리 날리는 고양이 털도 신경 쓰이고, 그냥 밥만 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고 생각했어요. ‘죽지 말고 살아라’ 그런 마음으로요.  그런데 2015년 겨울이 유독 추웠거든. 쓰레기를 내다 버리러 가는 잠깐 사이에 손이 얼어붙을 정도로 정말 추운 겨울이어서 아직도 기억이 선명해. 두호가 첫째 고양이고, 둘째가 치킨인데 그때 치킨이는 태어나기 전이었던 것 같아.   두호가 한 8개월 차나 되었을라나? 작은 몸으로 오돌오돌 떨면서 우리 문을 앞발로 툭툭 노크하듯이 치는 거야. 혼자 사는 집이지만 사람 사는 집이라고 밥 짓고 난방 돌리는 온기가 느껴졌는지 집 앞을 떠나질 않더라고. 밥을 줘서 보내도 가질 않고 계속 그 자리에 맴돌고 있었어. 하루 이틀 지켜보고 있었는데, 마침 집에 들른 내 딸애가 그러더라고. “아버지 쟤 저러다 죽어요. 겨울 동안만이라도 안에서 돌봐줘요.”라고. ‘딱, 겨울 동안만이다’하고 문을 열어줬더니 호다닥 들어오는 게 귀엽고 안쓰럽고 그래서 마음이 더 쓰였어.   한 계절만 함께 보내려 했는데, 봄 되고 초여름 되니까 밖에서 놀다가 자기 쏙 빼닮은 어린 고양이 한 마리도 데리고 왔어. 덩치가 정말 작아서 뒤에서 보면 딱 삼계탕 닭 모양이라서 놀리면서 치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 좀 크면 이름 바꿔주려고 했는데 음식 이름으로 동물 이름 지어주면 잘 산다고 해서 지금도 그냥 치킨이에요. 그렇게 그냥저냥 같이 살게 된 거지. 두 마리가 사이도 워낙 좋고, 보고 있으면 손주처럼 흐뭇해요.▲ 두호와 치킨  A: 고양이들이 서로 영역 차지한다고 크게 싸우기도 한다던데 우리 애들은 바깥에 마실 나가서도 잘 안 싸워. 외려 줄줄이 밥 주라고 우리 집으로 끌고 오는 것 같던데. 딸애도 애들 본다고 집에 자주 오게 되니까 내가 복덩이를 들인 것 같아 참 좋았어요.   쌍문동 살 때 TV를 보면서 집안에 고양이들이랑 누워있으면 창문 바깥에 동네 고양이들이 지나가면서 한 번씩 아는 척을 해. 빤히 쳐다보거나 어떤 애들은 놀자고, 밥 달라고 야옹하고 우는데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어. 우리 두호같이 누런색이 선명한 치즈태비나 삼색이, 턱시도, 까만 고양이가 자주 다녀갔어. 왠지 친척지간 같이 보이더라고. 곧 겨울인데 다들 잘 지내려나 걱정도 되네.  Q:  친하게 지내던 동네 분들도 고양이를 키우셨다면서요. 기억나는 분이 있을까요?  A: 고양이들 끼리 친해서 나도 더 친근하게 느끼는 거지. 골목 윗집 중에 분식집 하던 집이 있었어요. 그 집 고양이 렌이 우리 두호랑 호형호제하던 사이여서 우리 집에도 자주 놀러 왔었어요. 한 번은 그 집 어머니가 렌 찾으러 우리 집까지 오고 그랬어요. 참 인상이 푸근하신 분이었는데, 음식도 그렇게 맛있게 할 수가 없어요. 아드님도 싹싹해서 ‘새로운 고양이 장난감이 나왔다.’, ‘간식으로는 이게 좋다.’ 하면서 우리 집에 갖다 주기도 했었지. 다들 하나같이 고마운 사람들이었어요.  Q: 쌍문동 우이성당 집이 어르신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A: 제 2의 고향. 노년기에 마음 편한 곳에서 사는 것도 큰 복이라고 했어요. 한 번은 문을 깜빡하고 안 잠그고 나간 적이 있었어.  친구만나다 중간에 그게 생각나긴 했는데 희한하게 하나도 걱정이 안 되더라고. 이웃끼리 서로 다 알고 지나칠 때마다 밝게 인사하고. 그런 동네에 도둑이 들겠어요?  6년 가까이 살면서 사건, 사고 일어났다는 얘기도 못 들어봤고, 참 정감 넘치는 곳이었어요. 지금 도봉동 집 계약 기간이 끝나면 다시 그 동네로 옮길 생각이에요. 이번에는 우리 치킨 두호가 살기 좀 널찍하고 마당도 혼자 쓸 수 있는 곳이면 좋겠구먼.  도둑고양이에서 길 고양이로, 이제는 함께 살아가는 가족으로. 고양이는 쭉 그냥 고양이였을 텐데, 인성 씨 마음속 ‘고양이’라는 존재는 10년 전과는 너무 다르다고 한다. 그리고 새로운 가족을 만나게 해 준 동네는 행복하고 소중한 공간으로, 언제라도 상황이 바뀌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으로 인성 씨 마음속에 자리 잡은 듯했다.   인성 씨와의 대화를 기록하고 정리하면서 좋은 집과 좋은 가족이 무엇일까에 대해 떠올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 가진 게 차고 넘치는 데도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요즘, 우리 마음을 빈틈없이 가득 채워주는 행복의 조건은 사실 그리 멀리 있지 않은 것 같다.  “삶이 넉넉하지는 않지. 젊을 때 바라던 모습으로 살고 있지도 않고. 그래도 우리 자식들 다 키웠고, 지금은 치킨이, 두호 굶기지 않고 장난감 사주고 간식 넉넉히 사줄 정도는 돼서 그게 행복해. 덕분에 담배도 끊게 되고. 나는 좋은 걸 더 많이 얻은 것 같아요. 다시 우이성당 쪽으로 이사 갈 때는 사글세 말고 전세값 마련해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거기가 나는 그냥 참 좋더라고. ”<기록 이진희>

인근 초등학교의 모태, 도봉구의 가장 어르신 학교 서울창동초등학교

작성자 | 이혜경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되고 그 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다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권의 머리말에 나오는 문장이다.   내게는 ‘창동초등학교’가 그러하다. 그냥 무심히 지나치던 곳이었다. 초등학교 하나가 있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곳이 지금은 내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 보이는 ‘창동초등학교’는 전과 같지 않다.정문에서 바라본 서울창동초등학교아파트 숲에 에워싸여 있다. 개교 당시는 인근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을 터인데  1930년 4월 1일생 서울창동초등학교  ‘창동초등학교’가 세상에 태어난 날은 1930년 4월 1일이다. 도봉구 최초의 학교로 올해 나이가 90세다. 당시 주소는 도봉구가 아닌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개교 당시 학교명은 ‘창동공립보통학교’였다. 그 이후 1938년 ‘창동심상소학교’, 1941년 ‘창동국민학교’로 변경되었다. 해방 이후 1963년 창동이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서울창동국민학교’가 되었다. 1996년에 ‘서울창동초등학교’로 바뀌었고 그대로 불리고 있다. ‘창동’은 그대로지만 초등교육기관의 명칭은 여러 번 변했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에는 일본 천황의 황국신민으로 키우겠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런 명칭이 해방이 되고도 51년이나 지나서야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바뀌는 과정에서도 저항이 많았다고 한다. 한 번 뿌리 내린 일제 잔재를 없애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인근 초등학교의 모태   ‘창동초등학교’는 1934년에 1회 졸업생을 내었고 2019년 2월까지 85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졸업생 누계가 25,952명이다.   도봉구에서 최초로 생긴 학교답게 ‘창동초등학교’는 근처 초등학교의 모태가 된 학교다. 1946년 상계초등학교를 시작으로 도봉초등학교, 방학초등학교, 창도초등학교, 숭미초등학교, 월천초등학교, 창경초등학교, 창일초등학교, 창원초등학교, 2004년 가인초등학교까지 10개의 초등학교가 ‘창동초등학교’에서 분리되어 나갔다.  학교 운동장에서 만난 전쟁과 평화  오가며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다가 학교에 들어가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바라본 학교 건물에서는 90년의 세월을 가늠할 수가 없다. 리모델링도 하고 새로 페인트칠을 하여서인지, 학교 건물은 벤자민 버튼의 거꾸로 가는 시계마냥 몇 년 전보다 어려져 있다. 90세 어르신이 아니라 열 살 안팎 초등학생의 모습이다. 깔끔하게 단장된 모습으로 서 있는 학교 건물  운동장에 서니, 입학식 날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와 앞으로나란히를 하며 줄을 맞추던 아이. 낮잠을 자다 일어나 아침인 줄 알고 가방을 등에 매고 나비처럼 팔랑대며 학교로 가던 아이. 선생님이 치던 풍금 소리에 맞춰 갈래 머리로 박자를 맞추며 종달새마냥 노래를 부르던 아이들 모습이 비눗방울처럼 떠다닌다. 평화롭다.  한참동안 내 눈 앞을 떠다니던 비눗방울들이 요란한 총성과 함께 투두둑 터지며 사라져갔다. 고개를 돌리자 운동장 한 모퉁이에는 겁에 질린 얼굴의 아이들이 숨어 있다. 풍금소리, 노래 소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대포 소리와 대전차가 굴러가는 소리로 가득 차 있다.  1950년 6월 27일 이곳 창동은 그야말로 총성이 난무하던 곳이었다. 한국전쟁 때 의정부 저지선이 무너지자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던 창동으로 북한군이 쳐들어 왔다. 우왕좌왕하던 국군은 몇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창동을 내어 주었다. 다음날인 6월 28일 미아리 방어선도 무너지고 서울이 함락되면서 ‘창동초등학교’는 북한군 수송부대의 거처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불암산에 숨어 유격대로 활약하던 육사 생도들이 ‘창동초등학교’에 거처를 정한 인민군 수송부대를 공격했지만 결국 탈환하지는 못했다.  그 시절을 살지는 않았지만 겁먹은 아이들의 눈길이 떠오른다. 얼마나 가슴을 졸이며 그 시간을 견뎠을까. 전쟁의 기억 중 두렵고 서글프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초등학교 운동장을 채웠을 무기와 총성의 이미지는 유독 공포스럽다. 우리 아이들에게 전쟁의 역사를 다시는 답습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왼쪽 사진 건물은 유치원이다. 학생 수가 감소하면서 빈 교실이 유치원이 되었다.학교 운동장과 계단에 아이들의 웃음소리만이 가득하기를 바라며 사진을 찍었다.  어둠 속에서 비로소 어깨를 펴는 창동리(倉洞里) 석조 이정표  후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가면 두 개의 석조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양곡 창고가 있었던 창동의 유래를 알려주는 중요한 기념물로 도봉구 향토문화재 제1호다. ‘倉洞里’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대리석 석조는 1995년 새로 만든 것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 낮은 키로 움츠린 듯 서 있는 화강암이 원본 이정표다. 가로 38cm, 높이 73cm, 두께 19cm의 화강암에 '倉洞里'라는 지명이 음각되어 있다. 지금은 마모가 심해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다. 원본 이정표가 마치 창동의 탯줄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옆에 터를 잡은 ‘창동초등학교’도 인근 학교의 모태가 된 것일까.  움츠려 있던 원본 이정표가 피어나는 시각이 있다. 어둠이 내리면 화강암에서 '倉洞里'라는 글씨가 나타난다. 빔으로 쏘아 인위적으로 만든 글씨다. 불빛 속에 환하게 빛나는 이정표는 세월의 고단함을 떨치고 어깨를 펴는 듯 보인다. 창동리 석조 이정표의 낮과 밤새로 만든 대리석 이정표와 원본인 화강암 이정표가 나란히 있다.어둠이 내리면 원본 이정표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듯 서서히 살아난다.  우물터에서 길어 올리는 수많은 이야기들  ‘창동초등학교’ 정문에서 서쪽을 향해 가면 학교 건물을 끼고 골목이 나타난다. 그 골목의 입구에 지금은 어떤 흔적 하나 없지만 우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물을 길어간 분 중에는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 선생의 며느님도 있었다. 그 며느님이 한학자이자 역사학계의 거두셨던 위당 정인보 선생의 둘째 따님이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창동으로 거처를 옮긴 두 집안이, 1942년 정인보 선생의 둘째 딸 정경완과 홍명희 작가의 둘째 아들 홍기무의 혼인으로 사돈의 연을 맺은 것이다.  우물터의 기억을 정양모 선생의 인터뷰에서 만났다. 정양모 선생은 정인보 선생의 아드님이다. 선생은 집에서 500미터쯤 거리에 우물이 있었고, 누나가 그 우물물을 길으러 다녔다고 회상하셨다. 초등학생이었던 정양모 선생께서 그런 누나가 안쓰러워 같이 물을 긷기도 했다고 한다.  우물이 있었던 길을 어르신 한 분이 걸어가고 계신다.이곳이 우물터인 것을 어쩌면 알고 계시는 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물은 사라져도 사연은 남아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렇게 두터운 인연의 두 집안도 분단의 비극을 피해갈 수가 없었다. 홍명희 선생은 월북을 했고 사돈인 정인보 선생은 한국전쟁 때 납북이 되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비극이 이 두 집안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참으로 마음 아픈 이야기다.  벽초(碧初)와 위당(爲堂)의 이야기를 하면 가인(街人)과 고하(古下)도 함께 떠올리게 된다. 가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대법원장이신 김병로 선생이시고 고하는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인 송진우 선생이다. 모두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의 감시를 피해 창동으로 오신 분들이다.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창동에서 둥지를 트신 것이다.   두레박을 던져 찰랑찰랑 물을 길어 올리는 우물터답게 이곳에 서면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굴곡진 역사와 일제에 저항하며 창동에 사셨던 인물들 이야기가 끝도 없이 길어 올려진다.   우리가 지킬 가치와 이루어야 할 일들의 이정표를 생각한다  ‘창동초등학교’와 그 주변을 거니는 일은 세월의 무게를 간직하고 역사를 견뎌온 사연들을 만나는 일이다. 그 사연들의 두레박들에는 우리나라 근현대사 질곡의 역사들이 출렁대며 길어 올려진다. 그 역사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와 이루어야 할 일들의 이정표를 생각한다.<기록 이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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