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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문화 아카이빙 프로젝트

도봉 아키비스트가 기록하는 도봉의 인물과 공간

지역문화 아카이빙은 도봉이 품은 다양한 문화의 가능성과 지역 자원을 주민이 직접 탐색,
기록하고 구성하여 중요한 홍보 자산으로 공유하는 프로젝트입니다.

탈-도봉에서 스테이-도봉하고 싶어진 이유 - 창동역의 재발견

작성자 | 오키씨

  그날도 그랬다. 흐릿한 조명, 길에서 올라오는 쓰레기 냄새, 술 취한 아저씨들의 알 수 없는 주정과 시큼한 술 냄새가 나를 맞았다. 창동역 1번 출구에서 우리집으로 가는 길은 늘 그랬다. 나의 서울생활은 20여 년 전 노원구 상계동에서 시작되었는데 육아와 낯선 서울살이에 지쳐있던 날들이었다. 어느 날 한 신문에서 노원구가 샐러리맨의 무덤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충격이었다. 안되겠다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날부터 막 6살이 된 큰아이의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수소문했다. 그리고 도봉구 창동으로 이사를 왔다. 일단 무덤의 이미지만은 피하고 싶었다.   창동으로 이사 온 후 처음엔 아이가 어려서 활동반경이 그다지 넓지 않았다. 집에서 유치원, 집에서 동네 슈퍼, 집에서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가 전부였다. 그래서 솔직히 잘 몰랐다. 도봉구가 타지역에 비해 생활편의 시설 등이 낙후되어 있었다는 걸! 큰아이가 초등학교엘 진학하고, 작은아이도 유치원에 갈 무렵 나도 서울생활이 조금은 익숙해졌다. 그 때부터였던 같다. ‘탈도봉’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던 것이.   다른 곳에서 일을 보고 창동역에 내리면 난립해있는 포장마차가 불쾌했다. 집주변에 서점이 없는 것이, 극장이 없는 것이, 박물관이 없는 것이, 분위기 좋은 카페가 없는 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싫었다. 강남에 사는 동창들이 넌 왜 그렇게 북쪽에 사냐고, 아래쪽으로 내려오라고 얘기하면 억지미소를 지으며 우리 동네가 얼마나 좋은데 그러냐며 일부러 멋있는 척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도 했었다.   그렇게 늘 ‘탈 도봉’하고 싶었던 내가 이젠 ‘스테이(stay) 도봉’하고 싶어졌다. 동네의 재발견이라고 할까! ▲ 넓어진 창동역 광장 / 깨끗하게 조성된 창동역광장,플랫폼61  창동역은 1호선과 4호선 환승역이다. 경기북부에 위치한 대학으로 가는 버스도 이곳에서 학생들을 기다린다. 예전엔 1번 출구에 내리면 포장마차가 질서 없이 늘어서 있었고, 버스정류장도 사람이 서있기엔 좁았다. 사람보다는 차들이 다니기 편한 곳이었다. 들여다보고 싶은 곳보다 피해야 할 것이 많았다. 좁은 정류장의 인파, 취객, 무질서한 차와 포장마차들이 얼른 이곳을 떠나라며 나를 채근하는 것 같았다.▲ 정돈된 포장마차 거리  지금은 달라졌다. 낮에는 포장마차가 잘 정돈된 컨테이너에 쏙 들어가 있다가, 어스름 저녁 무렵이면 다시 거리로 나온다. 규격화되고 깨끗해졌다. 더 편안하고 청결하게 포장마차의 정취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포장마차가 줄지어 있는 광장 앞엔 건강하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농구대가 들어섰고, 쉬어갈 수 있는 벤치가 놓여졌다. 집으로 가는 길 쪽엔 넝쿨나무가 올라가 자연 그늘을 만들도록 조형물이 설치되었다. ▲ 창동역사에서 집으로 가는 길 산책로 / 시민들을 위한 농구대  젊은이들이 거리에 많아졌고 밝아졌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날 미치도록 괴롭히던 쾌쾌한 냄새가 사라졌다. 1번 출구 바로 앞엔 차가 아닌 사람들을 위한 넓은 광장이 마련되었다. 지금은 코로나로 열리진 않지만, 동북4구 소상인들과 수공예 작가들의 프리마켓이 열리고, 청년들이 그들의 끼를 춤으로 발산하고, 도봉구에 터를 잡은 예술인들이 음악을 연주한다.  가벼운 차림으로 걸어 갈 수 있는 거리에 서점도 생겼다. 시원한 맥주가 마시고 싶어지는 여름밤이면, 슬리퍼 질질 끌고 나와 플랫폼61에 가서 이제는 대학생이 된 딸아이와 가볍게 한잔 한다. 컨테이너로 조성된 플랫폼61 야외테라스엔 우리집 반려견 콩순이도 함께 할 수 있어 더 좋다. ▲ 창동역1번 출구 마을 북카페 행복한 이야기  창동 역사 1번 출구 하부엔 ‘행복한 이야기’라는 북카페가, 2번 출구엔 ‘너른마루’라는 마을카페가 있다. ‘행복한 이야기’는 집중해서 공부해야 할 때 자주 가는 곳이다. 넓고 쾌적하고 조명도 적당하다. 공부하는 청장년층이 많은 곳이다. 2번 출구 쪽 ‘너른마루’는 소모임하기 적당한 마을카페다. 카페의 절반은 어린아이를 둔 부모들을 위해 편안한 마루가 있고 동화책도 손닿는 곳에 꽂혀있다. 동네주민 누구든 와서 동아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곳이다. 물론 커피 값도 비싸지 않고 맛도 좋다.▲ 창동역2번 출구쪽 마을카페 너른마루  공간이 주는 힘은 참 강력하다. 그 속에 이야기가 담겨있을 땐 특히 더 그렇다. 아이들이 초등생일 때 마을에서 함께 창동 역사에 그래피티로 그림을 그려 넣었다. 창동역을 개보수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의 그림은 사라졌다. 사라진 그림이 아쉽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어제 일처럼 재잘재잘 떠올라 자주 이야기 하며 웃게 된다. 창동역에서 마을버스로 세 정거장 거리에 있는 어린이도서관에선 동네주민들과 된장을 만들어 먹었다. 햇살 가득한 옥상에서 잘 익은, 해를 품은 된장이다. 집에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된장 담아 먹기가 동네의 동아리활동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혀끝에 맴도는 구수한 향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2015년부터 창동역 광장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프리마켓에 친환경 대안생활제 셀러로 참여도 했었다. 유해화학물질과 플라스틱 쓰레기 줄이는 방법을 공유하고 나누고 싶었다. 청소년을 위한 마을학교도 열어, 동네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동네에서 만들어내는 소소한 행복꺼리가 늘어나고 난 그렇게 토박이가 되어갔다.   이웃들과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 왔던 창동역은 많이 달라졌다. 어떤 공간은 사라지고 부서졌다. 그럼에도 서운하지만은 않다. 다시 일으켜 세워지고 가꿔지는 것을 지켜보았고, 그 곳에서 기존의 삶과 새로운 삶이 어울려 또 다른 활기를 만들어 내는 것도 보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새로운 기억이 되고, 또 다른 이야기를 담게 될 것이다. 좋은 이웃이 많은, 그래서 나누고, 경험할 것이 많았던 우리 동네. 그럼에도 여전히 새로운 변화와 경험을 기대하게 되는 우리 동네. 탈도봉하고 싶었던 내가 스테이 도봉하는 이유다. <기록 오키씨> 

쌍문동 작은 서점 '쓸모의 발견'

작성자 | 심호정

  요즘에는 컨셉을 가진 독립서점이 곳곳에 많이 있다. 얼마 전 집 근처에서 작은 독립서점을 발견했다. 서점이라고는 교보문고나 영풍문고같이 대형서점만 다녀본 나로서는 매우 신선하고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몇 번 방문을 해보고 독립서점의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 후 도봉구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서점들을 발견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어졌다. 나는 지인으로부터 덕성여대 근처에 ‘쓸모의 발견’ 이라는 특별한 서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곳을 직접 방문해 인터뷰해 보기로 했다.   ‘쓸모의 발견’은 덕성여대 후문 주택가에 위치한 1.5평의 정말 작은 서점이다. 과연 이 작은 서점에서는 어떤 주인분이 어떤 책들을 팔고 있을까 하고 마을버스를 타고 가는 길 내내 나를 궁금하게 했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서점으로 가는 길은 고요하고 잘 정돈된 풍경으로 마음이 편안했다. 깨끗한 길가와 선명하게 물든 단풍과 은행나무들이 어우러져 외국의 아름다운 마을을 방문한 느낌을 들게 했다.   덕성여대 후문에서 맞은편, 길 건너 주택가로 들어가면 약초원 쉼터 슈퍼가 나온다. 이곳을 지나 쭉 길을 따라 들어가면 바로 왼편에서 문을 활짝 연 ‘쓸모의 발견’ 서점이 자리하고 있다. 서점은 생각보다 이 구역에서 가장 눈에 띄고 찾기 쉬웠다.   서점을 처음 발견하자마자 본 모습은 동네 주민분과 즐겁게 대화하고 계시는 주인분이었다. 엄마를 따라온 꼬맹이들은 서점을 불편해하지 않고 마치 놀이터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생각보다 딱딱한 곳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 편안하게 서점으로 들어섰다.   외부는 빨간 벽돌로 되어있고 문 옆에는 작은 고양이 목각인형이 배치되어 있다. 그 옆에는 나무판자에 ‘쓸모의 발견’이라고 작게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서점 주위에 다른 상점이 없기 때문에 이 골목에서는 단연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내부는 꽃무늬 커튼으로 장식돼 있고 따뜻한 조명이 투영돼 신비롭게 보였다.    Q . 서점은 언제 개업하셨나요?   A . 2018년 11월 22일에 개업했다. 그날이 절기상으로 소설(小雪)이다. 가게는 11월쯤 준비가 끝났는데, 언제 문을 열까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소설(小說)을 파는 서점이니까 다가오는 소설(小雪)에 개업을 하자 해 일부러 맞췄다. 말장난인 거다.   Q . 서점을 운영하게 된 계기와 작은 공간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 1963년에 지어진 집을 샀는데 외부에 매우 작은 창고가 있었다. 나는 이곳을 창고로 두기보다 좀 더 가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사용하고 싶었다. 연남동에 갔더니 주차장을 개조해 가게를 하는 곳이 있었다. 나도 그곳처럼 창고를 개조한 가게를 내보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엔 내가 가진 작은 소품들과 찻잔을 파는 소품샵을 할까 했지만, 차도 마실 수 있고 소품들이 장식되어 있는 작은 서점을 운영해보기로 방향을 조금 전환해봤다.    Q . 도봉구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죠?   A . 저렴한 부동산도 있지만 동네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집을 여기저기 보러 다녔는데 이곳이 유일하게 어떻게 오셨냐며 주민분이 먼저 말을 걸어 주셨다. 그때 친근하고 반갑게 맞아주시던 모습 때문에 이곳이라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을 들게 했다. 그리고 마을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어떤 곳은 개발이 안 돼서 집이 가꾸기 어려운 상태로 방치된 폐허 같은 동네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곳의 오래된 집들은 관리 된 듯 모두 깔끔했고, 골목 하나하나가 말끔해 내 마음을 끌었다.   Q . 서재보다는 부엌을 연상하게 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을 처음 인테리어 했을 때 사장님의 아이디어가 들어갔나요?   A . 건축설계사와 상의하며 직접 인테리어를 계획했다. 창문 위치도 내가 정했다. 싱크대는 차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오시는 손님들에게 대접해드릴 때 필요할 것 같아 놓게 됐다. 그 외에 가구들은 내가 만들었다. 직접 나무를 주문하여 잘라 사포질을 하고 기름을 먹여서 책을 진열할 찬넬선반과 작은 책상을 만들어 넣었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은 개인 소장품이다. 동네 어린이들이 엄마 따라 놀러 오면 구석에 있는 작은 장난감들을 가지고 놀다가 널브러뜨려서 위치가 자주 바뀌곤 한다. (웃음) 공간도 작고 소품들도 작아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Q . ‘쓸모의 발견’ 이라는 서점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 해주실 수 있나요?   A . 요즘은 사람들이 소설이나 문학이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꼭 실용서적만이 쓸모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소설을 통해서 세상을 경험하고 동기부여를 얻는다. 소설 속에서 발견하는 다양한 경험들이 삶 속에서 커다란 희망이 될 수 있고 배움이 될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이 소설 속에서도 자신만의 쓸모를 발견하길 바란다. 그리고 이미 이 공간 자체가 쓸모의 발견이다. 그냥 창고로 둘 수도 있었지만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서점으로써의 더 가치 있는 쓸모를 발견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Q . SNS에 가끔 책 소개하는 게시물들을 올리시잖아요. 흥미로운 책들이 많은데 입고되는 서적의 특별한 기준이 있나요?   A . 아무래도 작은 공간이기 때문에 책을 고르지 않으면 안 된다. 책은 제목, 작가, 설명을 보고 고른다. 책 선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작가의 관점이다. 편중되지 않은 시선을 가진 작가가 쓰는 글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스타일이 창의적인 소설 또한 많이 들여오고 한 문화권 안에 살아온 작가가 아니라 여러 나라의 문화를 경험하여 독자에게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는 책들도 자주 선택하는 편이다.    Q . 서점을 운영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A .  아무래도 공간이 좁아서 여러 명의 손님들이 함께 들어오실 수 없다. 어느 날은 오래 머무르시는 손님이 계셨다. 나는 그 손님을 응대하느라 밖에 다른 손님이 오신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분이 밖에서 한 시간이나 기다리셨다는 거다.    그날이 처음 우리 서점에 찾아오신 날이고 그 뒤로도 종종 책방에 오시는데 내가 추천해드리는 모든 책이 지금까지 거절당했다. 그래서 오실 때마다 이번에 추천해드리는 책은 성공해야 할 텐데 하고 긴장한다. 또 기억에 남는 손님은 내가 금요일의 손님이라고 부르는 분이다. 항상 금요일에만 들렀다 가시는 데 뵐 때마다 재미있고 궁금증을 유발하는 손님이시다.  Q . 서점에 들어오면서 문 앞에 가로주택정비사업 반대라고 쓰인 것을 봤다. 동네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그리고 왜 반대하시는 건가요?   (참고) 가로주택정비사업이란? 재건축·재개발과 달리 노후·불량건축물이 밀집한 가로구역에서 종전의 가로를 유지하면서 노후주택을 소규모로 정비하여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사업을 말한다. 사업 시행이 빠르게 진행돼 많은 지역에서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곳에 오래 사신 분들은 자신의 동네를 잘 가꾸는 분들이다. 낙엽을 쓸고 닦고 화분을 내놓고 길에 누가 버린 쓰레기는 꼭 주우시고 그렇게 신경 쓰시는 분들이 요즘 기운이 없으시다.   가로주택정비사업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동네에 낡은 빌라가 있는데 그 자리에 127세대 7층짜리 건물이 들어온단다. 재건축하려다 골목까지 엮어 가로주택 사업을 하겠다며 설명회까지 열렸다. LH주택공사나 국가에서 진행하는 거라고 말했지만 사실관계 확인이 아직 확실치 않다. 그래서 대부분 주민분들이 반신반의하신다. 하지만 낡은 집을 고쳤으면 하는 분들도 있어 선뜻 확고한 의견을 내는 분들은 많지 않다.    나는 이 사업에 반대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이 동네만의 매력적인 공간이 사라진다고 생각해 아쉬움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동네의 집들이 지어진 지 오래돼 낡았지만 꽤 관리가 잘 되어있다. 내가 이곳에 집을 마련하게 된 이유도 오래된 집의 빈티지한 매력 때문이었다.   나는 63년에 지어진 우리 집을 최대한 세월의 흔적을 살려 리모델링하고 정성 들여 가꾸었다. (서점 안에 붉은 벽돌벽을 가리키며) 이 벽도 세월의 흔적이다. 나는 이 붉은 벽이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남기고 싶었다. (가게로 들어가면 정면에 가장 넓은 벽면이 붉은 벽돌이다. 집의 외벽이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깨지고 긁히고 한 것이 일부러 한 것이 아니라 세월의 흔적이다. 나는 이 집에 애정을 갖고 있어서 노후화된 지역을 새로 정비하고 신축아파트를 짓겠다는 사업을 반대하고 있다. 그래서 종종 이런 문제로 대화가 열리면 동네 주민들에게 ‘이게 삶의 질을 정말 높일까요? 주거의 질이 정말 좋아질까요?’라고 묻곤 한다. 최근에 가장 고민하고 있는 질문이다.    동네가 유지되는 걸 바라고 오래된 기억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도 있다. 가장 기억에 남던 이야기는 아이에 관련된 얘기였다. “아이가 자라고 아이들이 이 동네에 살고 가난한 집에서 사는 애라고 놀림 받는 게 싫어 빨간 티를 입히고, 운동화도 하얀색으로 깔끔하게 하고 다니게 했다.”라는 얘기를 들으면 마음이 많이 쓰인다. 다 낡은 집과 동네 구석구석에 추억이 녹아있고 이곳에 오래 사신 주민들의 기억 속에 이 마을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동안 일구어온 동네에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의 얘기를 듣고 나면 더 지키고 싶다. <기록 심호정>

도봉역사문화길 (1) -암각글씨길을 따라가는 도봉산행

작성자 | 송주영

  서울의 산중 도봉산을 으뜸으로 꼽는 이들이 많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철마다 도봉산에 오르는 이유도 제각각입니다. 어떤 이는 아예 그 품에 삶터를 꾸미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그 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깁니다.   매력적인 바위와 봉우리를 가득 거느린 기세 좋은 산세로 등산객의 많은 사랑을 받는 도봉산에는 옛 선인들의 흔적도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길목마다 숨겨진 바위에 새겨진 글귀들입니다. 오늘은 가을의 환희가 절정에 다다른 도봉산을 돌아보며 바위에 새겨져 있는 선인들의 풍류와 삶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볼 참입니다.   142번 간선버스의 종점인 도봉산 입구역에 내려 도봉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서면 등산객을 위한 가게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도봉산 등산의 기점이 되는 곳이라 등산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골목입니다.   주변을 화사하게 수놓은 단풍 숲길을 걷다 보면 도봉탐방지원센터 앞을 지나게 됩니다. 북한산 둘레길을 만나는 지점이며, 도봉산 등산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마침 오가는 등산객에게 안내를 전하는 유성철 님을 만났습니다.   “도봉산의 능선길은 조합하기에 따라 오르내리는 길이 100여 개나 됩니다. 매년 8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연뿐 아니라 문화유산 등을 탐방하려고 찾는데, 최근에는 도봉산 곳곳에 얽힌 역사를 살피며 산을 오르는 사람도 부쩍 늘었어요. 그런데, 바위 글씨길을 탐방하시려면 먼저 북한산 국립공원 쪽에 탐방을 신청하고 오셔야 보실 수 있는데,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탐방이 대부분 취소가 되었어요. 어서 코로나가 끝나고 다시 탐방이 열리면 좋겠네요.”  “자세하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해요. 다음엔 꼭 신청하고 와야겠네요.”  “감사하긴요,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대부분의 바위 글씨는 현재 비 탐방구역에 자리잡고 있어서, 오늘은 탐방로의 몇몇 바위 글씨만 둘러보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도봉산 입구 매표소를 지나 공원의 입구에 들어서 큰길을 따라가면 왼쪽에 도봉산 상류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계곡이 있습니다.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적은 수량의 맑은 물이 청량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멋스러운 풍광과 맑은 물에 시 한 편을 읊고 그림이라도 남기고 싶은데, 학업에 지친 선비들은 오죽했을까요. 서원을 세워 심신을 다스리며 공부하기 안성맞춤인 장소였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땅에서 비스듬하게 솟아오른 바위가 보입니다. 바위 사면에는 도봉동문(道峰洞門)의 네 글자가 행서체(필사속도가 느린 해서와, 식별이 난해한 초서의 단점을 절충해 필사를 위주로 만든 글씨체)로 새겨져 있습니다.  송시열 선생이 쓰신 ‘도봉의 동문이 열리는 곳’이라는 뜻으로 후학들의 이정표이자, 서원의 전당에 들어섬을 알려줍니다.   도봉동문을 지나 완만하게 펼쳐진 길을 올라봅니다. 높은 가을 하늘과 양옆에 드리운 가을빛에 취해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면 자연스레 걸음이 느려집니다. 군데군데 세워져 있는 안내판의 글씨도 무심히 지나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우측 김수영시비 뒤편으로 도봉서원터가 나옵니다. 도봉서원은 서울에 소재했던 유일한 서원으로 옛 영국사 터에 자리하고 있으며, 1573년 선조 6년 양주목사 남언경이 조광조의 학문과 행적을 기리는 뜻으로 건립했다고 합니다. 그 후 300여 년간 서울 경기지역 선비들의 주요한 교육처가 되었는데, 고종 때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철조망 뒤로 터만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서원터 건너편 계곡 아래엔 고산앙지(高山仰止)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바위가 눈에 띕니다. 절반 이상만 보이는 상태라 안내판이 없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그야말로 자연과 어우러진 상태의 바위 글씨입니다. 곧은 절개로 유명한 김상헌의 장손 유학자 김수증의 글입니다. 김수증은 본래 자연을 좋아하는 인물로, 당쟁으로 아우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 자연에 은둔하다가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그렇게 올곧은 김수증이 정암 조광조 선생의 학덕을 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로 1700년(숙종26년) 7월에 바위에 이 글을 새겼다고 합니다.   이렇듯 바위 글씨 하나만으로도 글쓴이의 성품과 시대적 배경을 알 수 있어서 재미있었습니다. 또 다른 숨어있는 바위 글씨를 찾아 서원교를 건너고, 우이암을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도봉산에는 3대 계곡이 있습니다. 도봉서원 앞 ‘문사동계곡’과 원도봉계곡으로 불리는 ‘망월사계곡’ 그리고 무수골 ‘보문사계곡’입니다.  저는 그중 조선의 선비들이 스승에 대한 마음을 가득 담아 새긴 바위 글씨가 있는 ‘문사동계곡’으로 향합니다. 조선시대에는 깊은 산중이었을 곳에 어째서 글씨를 바위에 새긴 걸까 궁금해졌습니다.   폭신폭신한 낙엽들이 내는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어가며 산을 오릅니다. 그렇게 넋을 놓고 오르다 보면 무심코 지나갈 만한 자리에 ‘문사동 마애각자’라는 안내판이 왼쪽으로 보입니다. 바위를 찾아 한참을 내려다보니 기다랗게 누워있는 커다란 바위에 초서체(자형이 간소하고 필획이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특징을 가진 빠른 필사를 위해 만들어진 서체)로 멋스럽게 새겨져 있는 ‘문사동’ 바위 글씨가 보입니다.   다시 발길을 돌려 오르다 보니 왼쪽으로 고즈넉한 분위기의 구봉사가 나타납니다. 구봉사를 끼고 작은 계단을 오르다보면 오른쪽엔 구슬처럼 맑은 물이 흐르고 잠시 후 대덕교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대덕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 커다란 바위에 듬성듬성 뚫어놓은 구멍들이 보입니다. 아마 누각이나, 정자의 주춧돌이라 짐작이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도봉 절경인 이곳에 절간 불자(佛子)들의 집과 유학자들의 풍류처가 시대에 따라 오고 간 느낌입니다.   대덕교를 건너자 드디어 마지막 목적지인 서광폭과 화락정의 바위글씨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문사동 계곡의 백미는 구봉사 옆 계곡’이라 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 정도로 아름다운 바위와 맑고 아담한 폭포가 여럿 있다는 말인데, 지금은 물의 양이 적어서 폭포는 볼 수 없어 참 아쉬웠습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보이는 서광폭과 화락정이란 바위 글씨는 안내판이 없어서 숨은그림찾기 하는 마음으로 꼼꼼히 둘러봐야 찾을 수 있습니다. 글씨를 발견했을 땐 어찌나 반가운지, 하마터면 인사를 건낼 뻔했습니다.   서광폭포는 도봉산 4대 폭포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바위 사이에서 떨어지는 폭포의 모양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는 충분했던 모양입니다. 폭포 좌측 바위벽에 새겨진 서광폭(西光瀑)이란 글자는 폭포의 진가를 더욱 높여주었을 뿐 아니라 아름다움까지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왼)서광폭, (오)화락정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 속 바위글씨들이, 탐방객들의 시야에 감춰져 있다니, 안내판이 이렇게나 아쉬울지 몰랐습니다.   도봉산 탐방센터에서 이곳 대덕교 옆 바위글씨(서광폭, 화락정)까지의 거리는 대략 2km 정도 됩니다. 현재는 대부분의 계곡 바위글씨들이 비탐방 구역에 있어서 일반인들이 쉽게 볼 수 없지만, 탐방구역 내 바위글씨만으로도 옛 선비들의 예(禮)와 의(義) 그리고 풍류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다만, 몇몇 바위 글씨는 위치가 모호해 안내표시판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일반인들도 도봉산 트레킹을 하며 탐방할 수 있는 바위 글씨 길이 재정비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안고 하산합니다.  가을 단풍이 마무리되는 즈음에 다녀온 바위 글씨길 트레킹은 예를 중시하고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과 그 가운데에서도 풍류를 마음껏 즐길 줄 아는 선비들과 함께 한 기분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여러 번 도봉산을 찾아야 하는 이유겠지요?  땅이 꽁꽁 얼기 전에 도봉산의 오랜 천년 고찰과 불교문화가 남긴 문화유산이 가득한 ‘천년 고찰 길’을 올라볼 예정입니다. 아름답고 신비한 이야기가 가득할 산행이 벌써 기대됩니다. <기록, 일러스트 송주영>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어줘요, 삼촌! -카페 ‘엉클두’ 그리고 ‘Uncle(삼촌)’의 이야기

작성자 | 슈리

  창동역 2번 출구에서 창동초등학교를 지나 도보 15분. 오래된 빨간 벽돌 연립주택들이 있는 골목 사이를 지나 쭉 걷다 보면 COFFEE라고 써진 작은 입간판과 함께 카페 ‘엉클두’가 모습을 드러낸다.▲카페 엉클두의 모습. 빨간 입간판과 출입문이 빨간 벽돌 건물에 썩 잘 어울린다.  처음 <엉클두>를 방문했던 건 2012년 겨울. 오래된 주택가, 허름한 식당들뿐이었던 골목에 불쑥 나타난 어딘가 홍대스러운 카페. 동네와 어울리지 않는 그 분위기가 내 눈길을 끌었다. 지금이야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 쌍리단길 카페거리 등 예쁜 카페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당시에는 20대가 마음 붙일만한 공간이 딱히 없었다. 근처에 친구가 찾아와도 마땅히 갈만한 곳을 찾지 못했던 내게 엉클두는 든든한 ‘힙 플레이스’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8년. ‘엉클두’에 발을 들인 그 20대는 30대가 되었고, 그 사이 ‘엉클두’는 동네 분위기와 다른 낯선 카페에서 나만의 아지트가 되었다.  <오래된 동네에 불쑥 나타난 HIP한 카페>  삼촌에게 내가 ‘엉클두’에 입성한 첫날을 이야기하자 삼촌도 8년 전 카페 ‘엉클두’의 처음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기셨다. 정확히는 2012년 5월. 회사를 그만두고 무엇을 해야할까 고민하던 찰나, 당시 동업하기로 한 동생의 여자친구가 도봉구에 살고 있어서 드나들다 보니 여기에 카페를 오픈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어? 그럼 그 전에는 이 자리에 뭐가 있었는데요?”   “원래는 이 자리가 손칼국수 집이었지요. 아마 그 가게도 10년 정도 됐었던 걸로 아는데 그 가게를 인수 받아서 내가 이렇게 카페로 바꿨어요. 참고로 여기 인테리어 하나 하나 다 내 손을 안 거친 곳이 없습니다.”▲오래된 칼국수집은 건축 전공 사장님의 손을 거쳐 고급스러운 카페로 변신했다.  어쩐지... 예전부터 카페 인테리어가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삼촌의 원래 전공이 건축이란다. 카페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커피에 대한 관심보다, 전공을 살려 인테리어를 마음껏 할 수 있다는 매력 때문이었다고 한다. 8년 전 처음 ‘엉클두’를 발견했을 때 독특한 인테리어에 반해서 들어왔다고 하자 굉장히 쑥스러워하셨다. 오픈한 이후로도 끊임없이 인테리어에 변화를 주면서 더 다양한 사람들이 좋아해주고 찾아올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셨다고... 그러고 보니 그 때는 캐주얼하고 유니크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좀 더 따뜻하고 감성적인 느낌이다. 몇 년 전까지는 카페 정면에 한글로 크게 엉클두라고 써져있던 간판도 오늘 보니 작은 사이드 간판으로 바뀌어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둑해지면 그 작은 간판에 불빛이 들어오는데, 덕분에 예전보다 더 멀리서 엉클두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다.▲저녁 시간이면 카페 엉클두의 작은 간판에 환한 불빛이 들어온다.  변화를 위한 삼촌의 노력은 공간 인테리어에만 그치지 않았다. 원래 커피와 음료만 있던 ‘엉클두’에 언젠가부터 달콤한 디저트 메뉴들이 하나, 둘 등장했다.       “항상 손님들이 어떤 것을 원하는 지 살펴봐요. 트렌드를 주시하고 있는 거죠. 그러다보니 베이커리가 빠지면 안 될 것 같아서 시작하게 됐어요. 아내가 원래 결혼 전에도 취미로 베이킹을 좀 했었거든요. 지금 디저트는 전적으로 아내에게 맡기고 있어요.” ▲엉클두에는 매일 다른 종류의 디저트가 쇼케이스에 등장한다.   8년 전 ‘엉클두’ 첫 방문 당시 먹었던 크림소다가 생각이 났다. ‘창동에 크림소다를 파는 카페가 있다니!’하고 놀랐었는데 삼촌의 이야기를 들으니 절로 수긍되었다. 음료부터 스콘, 케이크, 마카롱 등 디저트에 이르기까지 ‘엉클두’의 메뉴는 늘 진화하고 있었다.    <은은한 커피향처럼... 8년 세월의 흐름동안 자연스레 창동에 스며들다.>  “8년 동안 카페가 조금씩 변화를 겪듯이 나 또한 변화를 겪었죠. 일단 처음 가게를 오픈했을 때는 총각이었는데 이제는 가족이 생겼다는 거. 가족이 있으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손님들과 계속 관계를 맺으면서 이제는 가족들 안부를 주거니 받거니 하기도 하고, 서로 이야깃거리가 점점 많아지는게... 이렇게 내가 창동 주민이 되어가고 있구나. 계속 타지 생활을 하던 내가 이제는 여기에 뿌리내리고 있구나. 그렇게 느껴져요. 창동이 제 2의 고향 같달까요.”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중년의 가족으로 보이는 손님들이 카페에 들어와 커피를 시키며 삼촌에게 ‘아이는 이제 몇 살 됐냐’며 자연스레 안부를 물어보셨다. 6살 유치원생이라고 하자 벌써 그렇게 컸냐며 깜짝 놀라는 손님, 그리고 “제가 나이 먹는 걸 느낍니다.”라고 너스레떠는 삼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동네 주민과 자연스레 안부를 주고받는 모습에서 다시 한 번 ‘엉클두’가 얼마나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카페인지가 느껴졌다.   “손님들이 변화하는 걸 보면 재밌어요. 중학생이었던 친구가 시간이 흘러 ‘삼촌! 저 취업했어요!’ 하면서 찾아오고, 미혼이었던 손님이 어느새 결혼해서 아기도 낳고 ‘저 애기 낳았어요~’ 하고 찾아오고. 손님들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어서 고마워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잊지 않고 이 곳을 찾아와 주는 손님들에게 고맙구요.”   마지막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엉클두’는 어떤 카페이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제가 처음 카페를 오픈할 때 생각한 세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 동네 사람들이 ‘커피하면 엉클두지!’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카페가 되자. 두 번째, 멀리서 손님이 왔을 때 대접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자. 마지막으로 세월이 흘러 창동에 찾아온 손님이 ‘그래, 여기 엉클두가 있었지. 앗! 혹시 지금도 있나?’ 그렇게 혹시 하는 마음으로 찾아왔을 때, 아직도 이 자리에서 여전히 내가 지키고 있는 카페가 되자.”   삼촌에게 이 세 가지 중 이미 1번과 2번은 이루신 것 같으니 마지막 3번도 꼭 지켜달라고, 나 또한 결혼하고 애기 낳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가도 훗날 내 아이를 데리고 ‘엉클두’에 와서 “삼촌! 저 왔어요!” 할 수 있게 이 자리에 오래 오래 남아달라는 당부의 말과 함께 삼촌과의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엉클두’는 쿠폰도 남다르다. 사장님 얼굴과 똑같은 모양의 도장을 찍는 재미에 나도 모르게 빠져 들어간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점심 식사를 끝내고 커피 한잔의 여유를 찾으러 수많은 손님들이 카페를 찾아왔다. 조용히 구석 자리에서 책을 보는 여성분, 수다 삼매경인 어머님들, 예쁜 잔에 든 커피를 들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는 어린 친구들까지. 연령대도 성별도 다양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손님들 모두 ‘엉클두’를 여러 번 와본 듯 익숙해했다는 것. 2012년 나만의 아지트라고 생각했던 이 공간은 8년의 세월 동안 어느새 더 많은 이들의 아지트가 되어 그렇게 동네에 없어서는 안 될 장소로 우리에게 자연스레 스며들고 있었다. <기록 슈리>

도봉구와 주민의 삶을 돌아보다 (1)

작성자 | 정지실

  1. 도봉구 토박이와의 만남  “도봉구 우이동 189번지..”  “앗, 선생님. 구 이름이 잘못된 거 아닌가요?”  “아니야. 그땐 그랬어. 그때는 거기도 도봉구였어.”도봉구평생교육학습관에서 인터뷰 이후 2020.10.28.  마을 조사단에서 만난 김희련 선생님 (60대, 여, 도봉구 쌍문동 거주)의 또랑또랑하고 다부진 목소리는 여전하셨다. 예전에 도봉환경교실에서 해설사로 일하고 계셨던 김희련 선생님을 여기서 또 뵙게 된 것이다. 선생님은 힐링캠프 강사, 궁해설사 등으로 봉사와 일을 하시면서 여전히 젊은이 못지않은 활약을 하고 계셨다.   선생님은 1963년부터 1983년까지 우이동에 사셨고, 이후 두 번의 이사를 거쳐 현재 도봉구 쌍문동에 거주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나는 선생님이 우이동에 사셨다는 이야기에 당연히 강북구 주민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추측과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그땐 거기도 도봉구였어. 나는 계속 도봉구에 있었던 거야”   한 곳에 사시면서 집 주소가 성북구와 도봉구, 강북구로 변하는 과정을 모두 경험하셨던 선생님은 도봉구 변천사의 산증인이었다.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행정구의 변화도 그렇고, 당시 이 지역의 풍경은 어땠을까. 선생님은 그 시절의 기억을 하나씩 나누어 주셨다.    2. 사람과 집은 그대로인데 소속된 행정명이 바뀌게 된다면?    창동, 도봉, 방학, 쌍문 등 현재 도봉구의 지명이 등장한 것은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경이라고 한다. 현재 도봉구와 주변지역은 당시 ‘양주군’과 ‘고양군’ 일대에 속했다가, 해방 후 ‘서울 성북구’로 편입되었다. ‘도봉구’의 등장은 73년의 일이다. 성북구로부터 분리되어 ‘도봉구’가 신설되었다. 이때도 현재의 도봉구는 아니었다. 88년 도봉구에서 노원구가 분리되었고, 95년에는 강북구가 분리되었다. 도봉구 주민들이 한때는 양주 혹은 고양 주민이었다가, 성북, 노원, 강북구민이 되었을지도 모를 긴 사연이다.   행정구역은 교통이 발달한 지금도 많은 것들을 가르는 존재다. 행정구역 경계에 따라 우리는 학군, 법원, 세무서, 훈련장, 주민 센터 등을 구별한다. 행정구가 바뀐 후에도 관공서의 소관이 바뀌지 않는 경우도 있어 당하는 입장인 주민에게는 종종 피곤한 일이 되기도 한다. 일상이 달라지지 않아도 마음가짐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름이 영역을 가르는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 우리 지역에 대한 소속감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묘하게도 선생님은 우이동이 도봉구였을 때에 그 곳에 사셨고 관할이 바뀌면서 다시 도봉구 쌍문동으로 이주를 한 까닭에 계속 해서 도봉구민으로 자처할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도봉구 주민인 셈이다. 나아가 선생님은 도봉구 지역에서 태어나셨고, 외가댁이 8대에 걸쳐 대대로 도봉구 지역에서 터를 이어왔기 때문에 더욱 깊은 고향의 향수를 느끼고 계셨다.   “자기 그거 알아? 모르지? 고향이 주는 맛, 그 기분...”   그래서 선생님은 고향을 결코 떠날 수가 없다고 하신다.    3. 기억속의 도봉구  이 지역에 오래 사셨던 만큼 도봉구의 옛 모습도 많이 간직하고 계실 것 같아 가장 기억에 남는 공간이나 장소를 여쭈어 보았다.  우이동 집 앞 계성교(현 청담교) 위에 서 있는 세 자매   선생님의 어린 시절 집 앞에는 작은 징검다리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징검다리는 나무로 만든 다리로 바뀌었고, 홍수로 그 다리가 떠내려 간 후엔 다시 콘크리트로 만든 돌다리가 생겼다고 하셨다. 그 다리가 현 우이동 청담교다. 주변에는 군부대들이 많았고, 일본인들의 적산가옥도 많이 남아있었다고 기억하셨다. 선생님은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며 하천에서 물고기도 잡고, 하루도 사고를 치지 않는 날이 드물었다고 회상하신다.   “어렸을 때 나는 사실 좀 극성맞아 가지고 여름이면 개울가서 물고기 잡다가 홀라당 빠지거나 가을이면 잠자리 잡으러 갔다가 원피스 찢어가지고 나타나고, 겨울에는 남자들 썰매장을 쫓아가서 썰매 타다 물에 빠져 불 앞에서 앞머리를 태우질 않나, 산에 가서 추석 솔 딸 때 뱀을 만나질 않나... 창동 논두렁에서 물 얼려서 스케이트타고 한참을 놀고... 그랬지.”    누렇게 바랜 흑백사진 너머에서도 선생님의 지난 세월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집 앞 돌다리 위에서 다정한 포즈를 잡고 있는 세 자매와 함께, 선생님은 그 시절로 돌아가 유년시절의 꿈을 꾸고 계신 것 같았다.   도봉구의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는 동안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도시의 풍경은 알아보기 힘들만큼 달라졌다. 그러나 흑백사진 속 선생님이 서 계신 다리 아래 물길은 지금도 도봉구를 지나고 있으리라. 그뿐인가. ‘도봉구 우이동’ 천방지축 소녀는 오늘도 지역을 위해 분주히 일하시면서 도봉주민으로 살아가신다. 테니스로 다져진 강단 있는 자세로.   “나 여기 도봉에서 계속 살거야~ 도봉은 내 평생 고향이거든..”<기록 정지실>

우이성당 고양이와 동네 사람들 (1) -고양이 엄마, 이도미

작성자 | 이진희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골목에는 많은 종류의 꽃과 풀, 작은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산다. 엄연히 자기 몫을 다하며 살아내고 있음에도 눈에 잘 띄지 않았던 존재들. 길에서 생활하는 고양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도미씨는 쌍문동 우이성당 근처의 이름 없는 고양이 활동가이다.외국인 배우자와 함께 2003년부터 17년째 같은 시간, 같은 자리를 지키며 고달픈 길고양이들의 식사와 건강관리, 처우개선을 도맡아왔다. 사람을 보면 후다닥 도망가기 바쁘고 낯가림이 심한 고양이라 할지라도 그녀 앞에선 순둥이가 되어 편안한 눈빛으로 ‘고르릉 고르릉’ 소리를 낸다. 깊어가는 가을, 도미씨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만남을 요청했다.   “만약 돌봄을 세밀히 계획하고 했더라면 아마 시작도 못 했을 거예요. 우연한 기회에 우리 고양이들을 만나게 되었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니 조금만 더 해보자 한 게 어쩌다 보니 벌써 17년 세월이 되었네요.”    도미씨는 현재 실내에서 15마리의 고양이와 생활하고 있으며 근처 고양이 50여 마리의 식사와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 2003년 새끼고양이 3마리를 구조한 이래로, 수많은 우이성당 근처 고양이들이 그녀의 손길을 스쳐 갔다. 일부는 같은 영역에 남았고, 일부는 다른 구역으로, 또 다른 일부는 안타깝게도 길 위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Q: 고양이들을 돌보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A: 2003년에 고양이 울음소리로 인해 동네에 문제가 생긴 적이 있었어요. 밤새 고양이 울음소리로 짜증이 났던 남자가 큰 망치를 들고 작은 고양이 세 마리를 위협하면서 소란을 피웠어요. 그때는 동네 분들도 지금보다 고양이에 대한 호감과 이해가 부족한 시절이었죠. 저 역시 고양이에 대해 잘 몰랐고 키워 본 경험도 없었지만, 고민할 겨를 없이 이 작은 생명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했고 안아 들어 집으로 데려오게 되었어요. 마치 운명처럼요.  17년 땀의 노고. 비가 오는 궂은날도, 혹한과 혹서에도 자신이 찾아가지 않으면 쫄쫄 굶을 눈빛들이 눈에 밟혀 2003년 이후 단 한 번도 저녁 약속을 잡아본 적 없다 했다. 일 년에 고작 한 번 있는 여름휴가조차도 남편과는 시기가 겹치지 않게 각기 따로 다녀왔다.   실로 긴 시간의 나눔과 돌봄. 평소 길고양이에 대한 호감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결코 쉽게 해 낼 수 없는 힘든 일이다. 도미씨는 동물병원에서 만나게 되는 다른 캣 맘들의 헌신에 비하면 자신의 활동은 너무 소소한 것이라며 스스로를 낮추었다.   Q: 활동하시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A: 초기에는 아무래도 동네 분들 중에 고양이를 달가워하지 않는 분들이 있어서 제가 밥을 줄 때 저에게 언성을 높이는 일이 종종 있었어요. 한 번은 본인의 노후화된 옥상 시설물이 다 내려앉은 게 전부 고양이 탓이고 밥 주는 제 탓이라며 몰아세우기도 했었고요. 사실 고양이가 얼마나 사뿐사뿐 다니는데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요즘은 오히려 반갑게 웃으며 좋은 일 한다고 인사해 주시고, 다른 동네로 이사 가서도 골목 고양이들 생각난다고 연락하시기도 하더라고요. 길고양이가 불청객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인식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 다행이에요.   곧 다가올 매서운 추위가 떠올라 나는 도미씨에게 겨울에 활동하기 특히 힘들지는 않은지 물었다. 이에 그녀는 오히려 골목길이 한적해 눈에 띄지 않게 밥을 주는 게 더 마음이 편하다고 답을 했다.   그리고 사료를 주는 장소가 본인 집 앞이 아니거나 공동주택의 이웃들이 동의한 급여가 아닐 경우 보다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얘기했다. 이웃들과 갈등의 소재가 될 수 있는 쓰레기를 만들지 않고, 최대한 밥을 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지속적으로 길고양이에게 급여를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고양이의 안전과 사람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키는 방법, 도미씨 부부는 그 합의점을 찾기 위해 부단히 고민하고 노력했을 것이다.   도미씨의 적극적인 고양이 돌봄 덕에 우이성당 골목을 지나는 마을 사람들은 이웃 간 더욱 가까워졌다. 고양이들이 나른한 기지개를 켜는 오후, 하굣길의 아이들은 “이 고양이 이름이 뭐예요?” ,“저 한번 만져 봐도 될까요?” 하며 어른들에게 말을 걸어온다.   하나 둘 길고양이 입양을 하게 된 가정도 늘어났으며, 입양할 여건은 안 되지만 일부러 고양이가 보고 싶어서 집까지 더 가까운 길을 두고 먼 길로 돌아가는 주민들도 있다. 가벼운 주머니 사정에도 고양이에게 주고 싶다며 간식과 장난감을 사 들고 찾아오는 앳된 학생들도 있었다.   누군가 고양이가 자유로이 활보하는 동네는 살기 좋은 곳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쌍문동을 전국에 알린 《응답하라 1988》 드라마 속 인물들처럼, 고양이로 연결된 우리 골목 사람들은 따스하고 정감이 넘쳤다. 물론 한 존재에 대해 ‘좋아한다’와 ‘그렇지 않다’는 개인의 몫이지만, 적어도 호감이 가지 않는다고 해서 길 위의 생명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무심히 골목을 지나갈 뿐이었다.   이건 결코 저절로 주어진 따스한 풍경이 아니었다. 십 수년간 이러한 공존을 위해 도미씨 부부는 큰 노력과 헌신을 해왔다. 수십 마리의 고양이에게 사비를 털어 마련한 사료로 하루 최소 한 끼의 따뜻한 식사를 제공하는 것. 눈을 맞추고 인사하고 건강을 살뜰히 살피는 것.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게 방법을 마련해주는 것. 개체 수 조절을 위해 중성화를 진행하거나 안내하고 고양이 전용 상비약을 공수해 필요한 개체에 급여하는 것. 그리고 지역 동물병원, 구청 담당자와 연계해 도움이 필요한 고양이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는 것. 이 모두가 단순히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성사될 수 없는, ‘시간’과 ‘비용’ ‘정성’ 삼박자가 다 어우러져야 가능한 일이었다.   “ 활동하면서 사실 제가 준 것보다는 고양이들로 인해 저희가 받은 치유의 힘이 더 큰 것 같아요. 아직도 고양이가 못마땅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잠시 잠깐 내 담장을 넘어서 우리 공간으로 들어온다고 해도 고양이는 자신을 반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분명한 선을 지키는 영리한 동물입니다. 조금만 인내심을 가져주시면 밥만 먹고 원래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고 절대 머물러 피해 주는 일이 없을 거예요. 곁을 내주시기가 어렵다면 그저 모르는 척, 고양이가 머물러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는 아주 작은 공간과 시간을 허락해주시는 건 어떠실까요? 사람과 고양이, 우리 모두 다 같이 어쩌다 태어나 함께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이니까요.”<기록 이진희> 

방예리에 깃든 고즈넉한 저녁 햇살 같은 공간, 헌책방 '근현대사 서점'

작성자 | 이혜경

  반짝이는 방예리 공방들  오후 3시쯤의 햇살이 좋아 그 시간이면 산책을 하곤 한다. 곧잘 내 발길이 닿는 곳은 ‘방예리’. ‘방학천 문화 예술거리’를 줄인 말이다. 그 곳에 가면 방학천이 있고 문화가 있고 예술이 있다.  방예리는 20년 가까이 유흥가 밀집 지역이었고 우범지대라 주민들이 불안해하던 거리였다. 흔히 빨간집이니 방석집으로 불리던 유흥업소들이 30개가 넘게 밀집되어 있어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불과 3년 전인 2017년까지의 이야기다.   2016년부터 민관이 합심해서 단속하고 폐업을 설득하고 전업을 유도하면서 거리 정비가 시작되었다. 마지막 남았던 31번째의 업소가 2017년에 폐업을 하고 우중충하고 을씨년스러워 오기를 꺼리던 거리가 이제 누구나 즐겨 찾는 주민들의 산책로가 되었다. ‘방예리’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듯 상큼하게 거듭난 것이다. 환골탈태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창문 하나 없던 유흥업소들이 유리문으로 환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공방이나 가게가 되었다. 가게에서는 쿠키를 굽거나 강정을 만들어 팔기도 한다. 캘리그라피를 배울 수 있는 공방도 보이고 생활도자기들이 예쁘게 진열되어 있는 공방 옆에는 아담한 카페도 문을 열었다. ‘방예리’의 가게와 공방들은 레이스 달린 옷을 입고 하얀 양말을 신은 소녀 같은 모습으로 반짝이고 있다.방예리 표지판이 보인다. 파스텔 톤으로 꾸며진 '방예리 지원센터' 앞에서 할머니 한 분이 창 안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계시다. 할머니 옷 색깔 때문인지 할머니도 방예리와 함께 반짝이는 느낌이다.  고즈넉하게 스민 저녁 햇살 같은 공간  그런 곳에서 내가 들르고 싶은 곳은 생뚱맞게도 헌책방이다. 헌책방의 이름은 ‘근현대사 서점’이다. 공방들과는 방학천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모서리에 있다. 반짝이는 방예리에 고즈넉하게 스미는 저녁 햇살마냥 60년대식 상호에 60년대식 간판을 달고 있다. 방예리 헌책방 <근현대사 서점> 바닥에 널브러진 책들을 주인아저씨가 묵묵히 정리하고 있다.   그 간판을 보면서 근현대사 역사서 전문 서적을 파는 곳인가 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헌책방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왔다. 주인아저씨처럼 보이는 분이 서점 앞에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바닥에 널브러진 책과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른 듯한 체구와 소박한 차림새가 서점과 닮은 분위기다.  상호가 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이렇게 물었다.  “이곳은 근현대사 역사서를 전문으로 파는 곳인가요?”  “아니요, 그냥 헌책방입니다.”  그랬다. 그냥 헌책방이었다.   서점 좀 구경해도 되냐고 여쭈어 보니 “아, 그럼요. 정리를 제대로 안 해 다니기가 어려울 것입니다.”라며 미안한 듯 대답하셨다.  깔끔하면 헌책방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들어가 보았다. 주인아저씨가 바깥에 나와 있는 이유를 알았다. 서점 안에는 책과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 주인아저씨가 앉을 자리가 없었다. 통로는 딱 한 사람만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이었다. 책장에 꽂힌 책들만큼이나 바닥에서 위로 쌓여 있는 책들도 넘쳐났다. 내가 가본 헌책방 중에서 가장 헌책방다웠다. 책들로 가득한 비좁은 통로와 어쩌면 밤새워 공부했을 사전들.    책 주인을 상상하는 즐거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마당 깊은 집’, ‘갈매기의 꿈’ 이런 제목의 책들을 만나니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한때 내 심장의 박동수를 높이던 책들을 보며 그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사전류들은 주로 바닥에 쌓여 있었다. 사전을 샀던 책 주인이 굳은 결심을 하고 영어의 달인이 되어보겠다며 사전을 찾아보고 뒤적였을 마음들이 훅 다가왔다. 또 한편으로는 작심삼일로 며칠 열심히 공부하다 영어는 내 것이 아닌가 봐 하고 던져버린 사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빽빽하게 꽂힌 책들을 둘러보다 몇 권을 집어 들었다. 꼭 읽겠다는 것보다 그 책들에게서 느껴지는 아련한 추억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며칠 전에도 들러 이런저런 책을 샀는데 그 중의 하나가 프랑스어 기초 문법책이었다. 책 안에는 공부한 흔적들이 있었다. 프랑스어에 심취했던 젊은 날의 내 모습도 그곳에 있었다. 그 책을 뒤적이면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책 주인과 내가 머리를 맞대고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기분이 들었다. 헌 책이 주는 이런 느낌이 참 좋다.  오래오래 보고 싶다.주인아저씨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찍어본 사진.분홍색 플라스틱 의자가 귀엽다. 원래 두 개였는데 동네분이 예쁘다고 해서 주고 남은 하나란다.가게 문에 적힌 대로 책뿐 아니라 오래된 다른 물건들도 있는 곳이다.   많은 헌책방들이 사라지고 있다. 부산 보수동 헌책방거리에 오피스텔이 들어서면서 폐업하는 가게가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청계천에 있는 헌책방도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면 왠지 동네 어귀의 오래된 나무가 사라지는 기분이다. 오래되고 낡은 것들이 다 버려져야 할 것은 아니다. 훈훈한 정과 추억을 담고 우리 곁에 다가오는 것들이기도 하다.  방예리를 거닐 때마다 멀리서도 보이는 ‘근현대사 서점’ 간판에 절로 눈길이 간다. 그리고 마음이 아늑해진다. 가게 문 밖에 낡은 물건들이 널브러진 풍경과 그 물건들을 거의 고개도 들지 않고 말없이 느린 동작으로 챙기는 아저씨의 모습은 한 편의 무성 영화 같다. 낡은 필름이 돌아가는 듯한 그 모습을 오래오래 보고 싶다.                                                    <기록 이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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