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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문화 아카이빙 프로젝트

도봉 아키비스트가 기록하는 도봉의 인물과 공간

지역문화 아카이빙은 도봉이 품은 다양한 문화의 가능성과 지역 자원을 주민이 직접 탐색,
기록하고 구성하여 중요한 홍보 자산으로 공유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도봉옛길 '경흥대로'에서 뜻밖의 파랑새를 찾다.

오키씨 |2020-12-09 | 조회 991

 

  호기심의 시작은 이랬다. 
  “옥희야, 우리 동네에 경흥대로라고 예전 조선시대 선비들이 도봉서원 갈 때 걸었던 길이 있대.” 
  갑자기 머릿속 시계가 거꾸로 돌기 시작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공부하는 게 즐거웠을까? 서원 가는 길엔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도봉서원에선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며칠을 묵었을까? 이렇게 시작한 호기심은 결국, 조선시대 경흥대로가 어디인지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지도 한 장과 책 한 권>
  조선시대 옛길이고 현재 흔적이 남아있는지도 알 수가 없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 도봉문화원으로 문의를 했다. 도봉문화원 진현우 연구원이 현재 도봉구 관광안내도에 경흥대로 옛길을 표시해 주었고, ‘역사기록에 보이는 도봉서원’ 책자 한 권을 건네주었다.
  “지도에 표시된 길은 조선시대 6대로 중 2대로인 경흥대로입니다. 경흥대로는 현재 도봉로가 생기기 전에 수도 한양과 한반도 동북면을 연결하는 길로 물자교류, 군사 출정, 유람로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간선도로의 역할을 했습니다. 도봉서원을 찾는 선비들은 보통 이 경흥대로를 따라 왔다가 현재 도봉동 부부약국 쪽에서 도봉산으로 들어갔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현재는 이 코스보다 도봉산역에서 도봉산으로 들어가는 루트가 많이 이용되지만, 부부약국 쪽이 예전 동네의 성황당이 있던 자리였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목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왼) 대동여지전도로 보는 경흥대로(출처:도봉문화원) (오) 도봉옛길 경흥대로(출처:도봉문화원)

▲ 연구원이 건네준 책한권과 도봉여행 관광안내도에 경흥로를 표시한 지도

  신경준이 집필한 『도로고(道路考)』에 따르면, 경흥로는 수도인 한성에서 두만강 하구에 있는 한반도의 최북단 어항(漁港) 서수라(西水羅)에 이른다고 한다. 지금의 행정구역 이름으로는 서울에서 의정부-양주-포천-철원을 지나 북한으로 이어지는 도로이다. 과거 금강산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고 하니, 조선시대에 풍류를 즐기고 글 좀 읽는다하는 선비들에겐 버킷리스트 같은 길이었으리라 짐작해본다. 통일이 된다면 육로로 금강산까지 아니, 유럽까지 이어질 수 있으니 그 의미가 대단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1972년 미아사거리에서 의정부를 잇는 왕복8차선의 ‘도봉로’가 생긴 이후 이면도로가 되었고, 물류나 유람로의 역할 대신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 터전으로서의 기능이 주가 된듯하다.

▲ 경흥대로 옛길 조선선비들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걷기 여행길

경흥대로 옛길 여정의 시작. 우이천로 24길

  연구원이 지도에 표시해준 경흥대로는 현재 우이천로 24길에서 시작해 도봉산역(예전 다락원터)까지다. 갔던 길도 뒤돌아오면 헤매는 길치인지라, 도봉에서 태어나고 자라 40년 이상을 살고 있는 토박이 친구와 길을 나섰다. 우이천로 24길에서 시작해, 신창시장->쌍문골목시장-> 정의여고 사거리->방학천 문화예술거리->신도봉시장->도봉동 부부약국->지금은 터만 남아있는 도봉산의 도봉서원 터까지가 둘러 볼 여정이다. 6시간 이상은 걸릴 것 같은데, 조선시대 선비들은 어땠을까?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이제 호기심을 채우러 떠나본다. 텀블러에 따뜻한 레몬차를 담고, 운동화에 두꺼운 양말까지 장착한다.  
 
<같은 길, 다른 사람들>
  도봉옛길 경흥로에선 신창시장, 쌍문골목시장, 신도봉시장 등 재래시장을 만나게 된다. 길을 따라 물자가 이동하고 사람이 모일 테니 시장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 조선시대엔 주로 동북지방에서 오는 북어 등의 어물과 양반들의 소비재가 길을 따라 시장에 모였다고 한다. 시끌벅적 활기가 넘쳐났을 그 곳을, 후손들 또한 이렇게 이어가고 있었다.

(왼)신창시장 (오)신창시장. 붕어빵으로 허기 달래기


(왼) 응답하라1988 촬영지였던 쌍문동 골목시장 (오) 활기 넘치는 신도봉시장

<그곳에 골목이 있었다>
  쌍문 골목시장에서 방예리(방학천문화예술거리)까지 걷는 길엔, 오래전부터 경흥대로를 지키고 있는 몇몇 점포들과 골목길 ‘쌍문2동 오래오래 기억하 길“이 있다.
  도봉구 보건소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구불구불 골목길 벽엔 파스텔 톤 꽃과 나무, 새와 풀이 가득이다. 이 골목의 집들을 자세히 보면 대문 앞에 두 개의 주소가 표시되어 있다. 벽에는 현재의 도로명 주소가 붙어있고, 우편함에는 지번 주소가 필기체로 대충 적혀 있다. 도로명 주소가 정착되기 전, 지번주소는 우편물과 택배들이 주인을 찾게 해 주는 이정표였다고 한다. 학교 가는 길이었고, 장보러 가는 길이었고, 바쁜 아침 출근길이었고, 누구에겐 풋풋한 만남의 길이었을 골목길이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나 또한 골목길에 대한 추억이 많아서일까?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고 있는 ‘기억되 길’이 왠지 위안을 주었다. 기억하려 노력해야만 과거는 추억이나 역사로 남는 것 같다. 많은 것이 빠르게 변하는 날들이라 이런 노력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왼) 쌍문2동 오래오래 기억하길 입구 (중) 오래오래 기억하 길 (오) 지번주소와 도로명주소


(왼) 시가 있는 골목길 (중) 향기품은 골목길 (오) 삶의 터전 골목길

▲ 골목길을 지키는 노력들. 날이 어두워지자 바닥에 불이 켜진다.

<파랑새를 만나다>
  걷다보니 한눈에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간판, 건물 몇몇이 눈에 띈다. 묵묵히 한자리에서 40년 이상을 지키고 있는 인상 좋으신 귀금속 전문점 정보당 사장님과 몇 마디 나눠보았다.
  “오래만 했어요. 돈은 못벌구. 요즘은 예전 같지 않아요. 금값이 너무 비싸서 그야말로 ‘귀금속’이 됐어요.”
  오랜 세월, 힘든 일은 없으셨냐고 물으니, 이리 답하신다.
  “지금은 돌 반지도 거의 안하고, 반지나 목걸이 수리 그런거나 하는 거지 뭐. 나만 그런 거 아니고 다들 잘 안되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거지 뭐. 요즘은 담배도 팔고 그래요.”
  지난 40년 세월을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사장님에게서, 태풍을 이겨내고 고요해진 눈빛을 소유한 어른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왼) 쌍문동 귀금속 전문점 정보당 (오) 고요한 눈빛이 인상깊은 정보당 사장님

  과거엔 길을 걷다 출출하면 주막에 들렀을 테다. 현재의 우린 토박이 친구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먹었다던 자장면이 맛있는 ‘한중관’을 찾았다. 아담한 실내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자장면과 짬뽕을 주문하고는 한자리에서 오래 장사하신 비결이 무엇인지 여쭈어 보았다.
  “장사가 아예 안 되면 옮기는데, 그냥저냥 운영이 되니까, 욕심이 없으니까 그냥 하는 거예요.”
  “인건비 안 나가고, 집세 안 나가니까...하하하.”
  30년 이상 중국집을 운영해온 사모님 얼굴에 그늘이 하나도 없다.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면 이토록 담담해지는가? 

  옛 조선 선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는 단순한 호기심에 출발한 여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찾은 건, 오랜 세월을 지나 욕심 없이 담담한 그 분들과, 변화와 개발의 과정 속에서도 오래되고 낡은 골목길의 가치를 기억하고 남겨주려는 애틋한 마음들이었다. 경흥대로 옛길에서 내가 만난 뜻밖의 소중한 파랑새들이다.


(왼) 깔끔하고 단정한 한중관 내부 (오) 참 맛있었던 자장면과 짬뽕

<어디에도 없음? 혹은 어디에나 있음!>
  도봉옛길 경흥대로를 걷는 긴 여정 끝에 도봉서원을 찾는 선비들이 도봉산 쪽으로 방향을 바꿔 걸었을 거라고 추정된다는 부부약국을 찾아본다. 신도봉시장을 지나고 북서울 중학교를 지나 걷다보니, 멀리서도 눈에 띄는 은행나무 한그루가 있다.    그 길에 나무라곤 오직 딱 하나다. 갑자기 고대유물이라도 발견한 듯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성황당엔 마을을 수호하는 나무나 장승이 주로 세워져 있다는데, 은행나무는 바로 그 표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선비들도 이 나무를 보면 이제 도봉서원에 다 왔다는 안도감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을 거라고 짐작해 보며 웃음마저 흘렀다. 

▲ 은행나무가 있는 부부약국. 멀리 도봉산이 한눈에 보인다.

  하지만 이럴 수가! 그 은행나무는 부부약국을 운영하는 약사님이 47년 전에 직접 심은 거라고 한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갑자기 허탈해졌다. 순간 성황당 터를 꼭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민센터와 동네에 오래 살고 있는 토박이주민 그리고 택시기사님에게 수소문해보았다. 그렇게 성황당 터를 찾던 중, 도봉역 버스정류장에 선명하게 써져 있는 ‘성황당’이란 표지판을 보게 되었다. 지금껏 왜 몰랐을까? 관심이 없어서? 버스를 타지 않아서? 이렇게 우리 곁에 묵묵히 선명하게 남아있는데 말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과거 성황당이 있던 자리는, 도봉역(성황당)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행정사 송삼준 사무소 뒤쪽으로 걸어가면 되고, 도봉서원으로 가는 길은 부부약국에서 도봉산 쪽을 향하면 된다. 어디에도 없는 줄 알고 헤매었으나 결국 어디에나 있는 파랑새처럼, 성황당 터는 자세히 보지 않아 놓친 버스정류장 이정표 같은 거였다.
   

(왼) 성황당이라 표시된 도봉역 버스정류장 (오) 성황당 버스정류장

<우리 곁에 오래 남기기>
  조선시대 선비들이 도봉서원으로 가는 길이 궁금해서 걷기 시작했던 도봉옛길 경흥대로에서 나는 뜻밖의 파랑새들을 만났다. 그들은 이미 내 주변에 있던 이웃이었고, 이제야 알게 된 사연과 흔적들이었다. 가까이에서 늘 함께였던 소중한 것들을 작정하고 나선 여정을 통해서야 비로소 발견한 셈이다.

  보물지도 찾듯 걷는 내내 안타까웠던 점은, 경흥로 옛길의 어떤 역사적 흔적이나 의미를 알리는 안내 하나 찾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흔한 이정표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경흥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티벳의 오체투지 길처럼 깨달음을 얻는 성지순례길은 아니다. 또 제주도의 올레길처럼 자연을 벗 삼아 힐링 하는 길도 아니다. 하지만 과거 조상들의 삶이 겹겹이 쌓여있는 길이었고, 한양에서 한반도 북쪽 끝 서수라에 이르는 길이자 금강산으로 가장 빠르게 통하는 길이었다고 한다. 그 의미를 담아 한번쯤은 걸어보고 싶은 ‘역사 체험 길’로 활성화시키면 어떨까? 

  작은 소망을 담아 이렇게 상상해 본다. 
  A씨는 경흥로에서 옛 지명을 잘 살린 이정표를 길잡이삼아 도봉산까지 여행 중이다. 걷는 여행자를 위한 스탬프 인증 수첩엔 이미 도장이 빼곡하다. 멀리 도봉산이 보이는 곳에 조선시대 주막카페가 있다. 주막에선 힙합이 흘러나오고, 한복 입은 청년이 음료를 주문받는다. 노천주막에서 A씨는 향기 가득한 꽃차를 마시며 한가로이 햇살을 즐긴다. 경흥로 안내책자엔 조선시대 코스튬을 한 ‘도보 여행자의 날’ 행사가 안내되어있다. 곧 다가올 ‘전통 거리 페스티벌’에도 눈길이 간다. 다음엔 어떤 여행을 할지 기대하며 도봉산으로 향하여 걷는다. 

<기록 오키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