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지역문화 아카이빙 프로젝트

도봉 아키비스트가 기록하는 도봉의 인물과 공간

지역문화 아카이빙은 도봉이 품은 다양한 문화의 가능성과 지역 자원을 주민이 직접 탐색,
기록하고 구성하여 중요한 홍보 자산으로 공유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전태일길’이 생겼다. 전태일 열사의 꿈은 헛되지 않았다.

이혜경 |2020-12-09 | 조회 1051

 

  내 인생의 죽비 전태일 열사

  죽비 같은 사람이 있다. 
  전태일 열사가 내게는 그런 분이다. 
  그와는 일면식도 없고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 그와 비슷한 부분도 없다. 그런데도 전태일이란 이름을 떠올리면 내 의식의 정수리를 죽비 하나가 툭 치는 느낌이다. 일상의 안락과 욕심만 챙기지 말고 이웃의 고통에도 귀를 기울이고 깨어있어라 말하는 듯하다. 
  스물세 살의 생을 던지며 외친 그의 절규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세상에 던져진 화두로 남아 있다. 

▲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을 읽고 난 후 전태일 열사가 내 인생의 죽비가 되었다.

  전태일 열사가 떠난 지 벌써 50년
  2020년, 올해는 전태일 열사(1948~1970)가 세상을 떠난 지 50주기가 되는 해다. 전태일 열사를 기리는 많은 행사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그 나름 기억에 남는 것 몇 개가 있다.
  노동계 인사 중 최초로 전태일 열사에게 무궁화훈장을 추서한 것이다. 무궁화훈장은 국민 복지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이에게 수여하는 국민훈장이다.
  또 하나는 전태일 문패를 단 ‘전태일의 집’을 그의 고향인 대구 남산동에서 개관한 것이다. ‘전태일의 집’은 전태일 열사 가족이 문간방에 세를 들어 살았던 집으로 친구와 가족들이 오랜 기간 돈을 모아 매입했다. 그 집에 산 기간은 짧았지만 전태일 열사는 그때가 인생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한다. 
  그리고 도봉구에 ‘전태일길(ChunTaeil-gil)’이 생긴 것이다. 도봉구는 “스물셋의 젊음으로 온몸을 불사르며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쳐 한국 노동운동의 초석을 마련한 전태일 열사의 50주기를 기리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전태일 열사가 살았던 도봉구 쌍문동 208번지
  도봉구 쌍문동에 ‘전태일길’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자 동네주민으로서 그곳을 꼭 가보아야겠다는 사명감이 솟았다. ‘전태일길’을 찾아가려고 검색해 보았다. 도로명주소상 ‘해등로 25길’ 구간으로 길이 279m 폭 15m 길이다. 전태일재단과 사전협의를 한 명예 도로명으로, 사용 기간은 5년이라고 나와 있었다. 영구적인 것은 아니어서 서운했다. 
 
  전태일 열사가 도봉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아한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의 짧은 생애에서 마지막에 살았던 곳이 바로 도봉구  쌍문동 208번지(현 56번지)이다. 1966년 그가 살던 남산의 판자촌 동네가 불이 나 철거가 되었다. 오갈 데가 없게 되어 살 곳을 찾아 흘러들어 오게 된 곳이 쌍문동이다. 그가 세상을 뜬 이후에도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동생들은 이곳에서 계속해서 거주했다. 당시 판자촌이었던 이곳은 1985년 재개발이 되어 아파트단지로 바뀌었다. 현재는 삼익세라믹아파트 112동이 그가 살던 집터다. 
  ‘전태일길’은 도봉구가 전태일 열사와의 이런 인연과 기억의 끈을 놓지 않고 만든 것이다. 

▲ 쌍문동 208번지 판자촌은 아파트 단지가 되었고 전태열 열사가 살던 판자촌 집터는 쌍문동 삼익세라믹아파트 112동이 되었다.

  ‘전태일 열사 옛 집터’ 표지판은 어디에
  ‘전태일길’을 가기 전에 전태일 열사가 살았다는 곳인 삼익세라믹 112동부터 찾아갔다. 그 근처 어딘가에 집터 표지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갔는데 막상 112동 주변에는 보이질 않았다. 
  근처를 둘러보다 일하시고 계신 경비 아저씨께도 여쭈어 보고 지나가는 주민들에게도 여쭈어 보았지만 집터 표지판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계셨다. 
  마침 한 분이 아파트 후문 쪽을 가리키며 저 근방에 있었는데 요즘은 보이질 않는다고 하셨다. 있었는데 보이질 않다니, 그럼 없앴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전태일길’도 만든 도봉구에서 집터 표지판을 없애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후문 쪽으로 발길을 돌리며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당연히 아파트 안 어딘가에 세워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없었다. 아파트 후문을 나와서야 발견했다. 아파트 단지 내부에 전태일 열사 집터 안내판을 세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일까. 마음이 복잡해졌다.
  집터 표지판은 창경초등학교 뒤 담벼락 모퉁이에 서 있었다. 


▲ '전태일 열사 옛 집터' 표지판이 창경초등학교 뒤편 울타리에 서 있다.

  전태일 열사와 창경초등학교의 동병상련
  창경초등학교 가까이에 ‘전태일 열사의 옛집터’ 표지판이 있는 것이 동병상련의 인연처럼 느껴졌다. 전태일 열사가 살던 남산의 집이 불이 나 어쩔 수 없이 이곳 쌍문동에 와서 거처를 마련했듯이 창경초등학교도 원래 이곳에서 세워진 학교가 아니었다.
  창경초등학교는 종로구 연건동에 있었다. 학교가 창경궁 맞은편에 있어서 창경초등학교다. 연건동을 떠나왔지만 학교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어떻게 이곳으로 왔어?”
  “살고 있던 남산 판자촌에 불이 나서 이곳에 오게 되었어. 무허가 판자촌 지어 겨우 살았어. 너는?”
  “난 창경궁 근처에서 살았어. 그런데 그 근처에 다른 초등학교가 들어오면서 밀려서 쌍문동으로 왔어. 내가 왔을 때는 이곳 쌍문동이 아파트 단지라 판자촌은 볼 수가 없었어.”
  “너나 나나 밀리는 인생이었네. 내가 동대문에서 쌍문동까지 걸어올 때 창경궁 쪽으로 걸으며 너를 본 것도 같아.”
  “그 먼 길을 걸었다고? 왜?
  “여공들이 배가 고프다고 해서 풀빵 사주고 나면 차비가 없었어. 그래서 집까지 2시간 넘게 걸어갔지 뭐.”

  이제는 서로 친숙해져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며 지내겠지. 길가에 덩그러니 서 있는 ‘전태일 열사 옛집터’ 표지판이 외롭지 않기 바라며 이런저런 상상을 해 본다. 


창경초등학교. 종로구 연건동 창경궁 근처에 있던 학교가 쌍문동으로 이전해 왔다.

  해등로 25길 ‘전태일길’
  ‘전태일길’을 찾아가며 길을 묻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근방 어딘가에 있어 잘 찾을 듯했다. 또 하나는 모른다는 대답을 듣는 일이 슬펐기 때문이다. 집터 표지판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잊혀서는 안 될 사람이 잊히는 느낌이었다. ‘전태일길’을 물으며 또 그런 느낌을 맛보고 싶지 않았다.
  삼익세라믹 아파트 정문에서 쌍문 한양아파트 방향으로 가면 ‘전태일길’이 있을 것 같았다. 내 예상은 맞았다. ‘전태일길’이라는 팻말이 ‘해등로 25길’ 도로명 이정표와 함께 신호등 기둥에 걸려 있었다.
  ‘전태일길’은 쌍문동 한양2~5차아파트와 삼익세라믹아파트 단지 사이에 난 길이다. 279미터의 2차선 일직선 도로라 시작점에서 끝이 보였다. 인도로 천천히 걸었다.


‘전태일길’ 이정표를 보며 ‘전태일길’ 구간을 걸었다. 오른쪽 사진이 ‘전태일길’이다.

  아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늦가을의 바람이 제법 쌀쌀하였다. 장갑을 끼지 않고 갔더니 손도 곱았다. 전태일 열사는 차비가 없어 직장인 동대문에서 쌍문동까지 13킬로미터를 걸어 다녔다는데, 겨우 279미터를 걸으며 조금 춥다고 움츠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어깨와 허리를 폈다. 걸어가는 동안 전태일 열사를 위해 지었다는 ‘그날이 오면’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계속 흥얼거려졌다.

한밤의 꿈은 아니리 / 오랜 고통 다한 후에 /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 한 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 아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이혜경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