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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문화 아카이빙 프로젝트

도봉 아키비스트가 기록하는 도봉의 인물과 공간

지역문화 아카이빙은 도봉이 품은 다양한 문화의 가능성과 지역 자원을 주민이 직접 탐색,
기록하고 구성하여 중요한 홍보 자산으로 공유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도봉역사문화길 (1) -암각글씨길을 따라가는 도봉산행

송주영 |2020-11-16 | 조회 603

  서울의 산중 도봉산을 으뜸으로 꼽는 이들이 많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철마다 도봉산에 오르는 이유도 제각각입니다. 어떤 이는 아예 그 품에 삶터를 꾸미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그 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깁니다. 

  매력적인 바위와 봉우리를 가득 거느린 기세 좋은 산세로 등산객의 많은 사랑을 받는 도봉산에는 옛 선인들의 흔적도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길목마다 숨겨진 바위에 새겨진 글귀들입니다. 오늘은 가을의 환희가 절정에 다다른 도봉산을 돌아보며 바위에 새겨져 있는 선인들의 풍류와 삶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볼 참입니다. 

  142번 간선버스의 종점인 도봉산 입구역에 내려 도봉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서면 등산객을 위한 가게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도봉산 등산의 기점이 되는 곳이라 등산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골목입니다. 
  주변을 화사하게 수놓은 단풍 숲길을 걷다 보면 도봉탐방지원센터 앞을 지나게 됩니다. 북한산 둘레길을 만나는 지점이며, 도봉산 등산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마침 오가는 등산객에게 안내를 전하는 유성철 님을 만났습니다.
 
  “도봉산의 능선길은 조합하기에 따라 오르내리는 길이 100여 개나 됩니다. 매년 8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연뿐 아니라 문화유산 등을 탐방하려고 찾는데, 최근에는 도봉산 곳곳에 얽힌 역사를 살피며 산을 오르는 사람도 부쩍 늘었어요. 그런데, 바위 글씨길을 탐방하시려면 먼저 북한산 국립공원 쪽에 탐방을 신청하고 오셔야 보실 수 있는데,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탐방이 대부분 취소가 되었어요. 어서 코로나가 끝나고 다시 탐방이 열리면 좋겠네요.”
  “자세하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해요. 다음엔 꼭 신청하고 와야겠네요.”
  “감사하긴요,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대부분의 바위 글씨는 현재 비 탐방구역에 자리잡고 있어서, 오늘은 탐방로의 몇몇 바위 글씨만 둘러보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도봉산 입구 매표소를 지나 공원의 입구에 들어서 큰길을 따라가면 왼쪽에 도봉산 상류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계곡이 있습니다.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적은 수량의 맑은 물이 청량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멋스러운 풍광과 맑은 물에 시 한 편을 읊고 그림이라도 남기고 싶은데, 학업에 지친 선비들은 오죽했을까요. 서원을 세워 심신을 다스리며 공부하기 안성맞춤인 장소였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땅에서 비스듬하게 솟아오른 바위가 보입니다. 바위 사면에는 도봉동문(道峰洞門)의 네 글자가 행서체(필사속도가 느린 해서와, 식별이 난해한 초서의 단점을 절충해 필사를 위주로 만든 글씨체)로 새겨져 있습니다.
  송시열 선생이 쓰신 ‘도봉의 동문이 열리는 곳’이라는 뜻으로 후학들의 이정표이자, 서원의 전당에 들어섬을 알려줍니다. 



  도봉동문을 지나 완만하게 펼쳐진 길을 올라봅니다. 높은 가을 하늘과 양옆에 드리운 가을빛에 취해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면 자연스레 걸음이 느려집니다. 군데군데 세워져 있는 안내판의 글씨도 무심히 지나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우측 김수영시비 뒤편으로 도봉서원터가 나옵니다. 도봉서원은 서울에 소재했던 유일한 서원으로 옛 영국사 터에 자리하고 있으며, 1573년 선조 6년 양주목사 남언경이 조광조의 학문과 행적을 기리는 뜻으로 건립했다고 합니다. 그 후 300여 년간 서울 경기지역 선비들의 주요한 교육처가 되었는데, 고종 때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철조망 뒤로 터만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서원터 건너편 계곡 아래엔 고산앙지(高山仰止)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바위가 눈에 띕니다. 절반 이상만 보이는 상태라 안내판이 없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그야말로 자연과 어우러진 상태의 바위 글씨입니다. 곧은 절개로 유명한 김상헌의 장손 유학자 김수증의 글입니다. 김수증은 본래 자연을 좋아하는 인물로, 당쟁으로 아우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 자연에 은둔하다가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그렇게 올곧은 김수증이 정암 조광조 선생의 학덕을 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로 1700년(숙종26년) 7월에 바위에 이 글을 새겼다고 합니다. 



  이렇듯 바위 글씨 하나만으로도 글쓴이의 성품과 시대적 배경을 알 수 있어서 재미있었습니다. 또 다른 숨어있는 바위 글씨를 찾아 서원교를 건너고, 우이암을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도봉산에는 3대 계곡이 있습니다. 도봉서원 앞 ‘문사동계곡’과 원도봉계곡으로 불리는 ‘망월사계곡’ 그리고 무수골 ‘보문사계곡’입니다.
  저는 그중 조선의 선비들이 스승에 대한 마음을 가득 담아 새긴 바위 글씨가 있는 ‘문사동계곡’으로 향합니다. 조선시대에는 깊은 산중이었을 곳에 어째서 글씨를 바위에 새긴 걸까 궁금해졌습니다. 

  폭신폭신한 낙엽들이 내는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어가며 산을 오릅니다. 그렇게 넋을 놓고 오르다 보면 무심코 지나갈 만한 자리에 ‘문사동 마애각자’라는 안내판이 왼쪽으로 보입니다. 바위를 찾아 한참을 내려다보니 기다랗게 누워있는 커다란 바위에 초서체(자형이 간소하고 필획이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특징을 가진 빠른 필사를 위해 만들어진 서체)로 멋스럽게 새겨져 있는 ‘문사동’ 바위 글씨가 보입니다. 



  다시 발길을 돌려 오르다 보니 왼쪽으로 고즈넉한 분위기의 구봉사가 나타납니다. 구봉사를 끼고 작은 계단을 오르다보면 오른쪽엔 구슬처럼 맑은 물이 흐르고 잠시 후 대덕교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대덕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 커다란 바위에 듬성듬성 뚫어놓은 구멍들이 보입니다. 아마 누각이나, 정자의 주춧돌이라 짐작이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도봉 절경인 이곳에 절간 불자(佛子)들의 집과 유학자들의 풍류처가 시대에 따라 오고 간 느낌입니다. 

  대덕교를 건너자 드디어 마지막 목적지인 서광폭과 화락정의 바위글씨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문사동 계곡의 백미는 구봉사 옆 계곡’이라 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 정도로 아름다운 바위와 맑고 아담한 폭포가 여럿 있다는 말인데, 지금은 물의 양이 적어서 폭포는 볼 수 없어 참 아쉬웠습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보이는 서광폭과 화락정이란 바위 글씨는 안내판이 없어서 숨은그림찾기 하는 마음으로 꼼꼼히 둘러봐야 찾을 수 있습니다. 글씨를 발견했을 땐 어찌나 반가운지, 하마터면 인사를 건낼 뻔했습니다. 

  서광폭포는 도봉산 4대 폭포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바위 사이에서 떨어지는 폭포의 모양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는 충분했던 모양입니다. 폭포 좌측 바위벽에 새겨진 서광폭(西光瀑)이란 글자는 폭포의 진가를 더욱 높여주었을 뿐 아니라 아름다움까지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왼)서광폭, (오)화락정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 속 바위글씨들이, 탐방객들의 시야에 감춰져 있다니, 안내판이 이렇게나 아쉬울지 몰랐습니다. 

  도봉산 탐방센터에서 이곳 대덕교 옆 바위글씨(서광폭, 화락정)까지의 거리는 대략 2km 정도 됩니다. 현재는 대부분의 계곡 바위글씨들이 비탐방 구역에 있어서 일반인들이 쉽게 볼 수 없지만, 탐방구역 내 바위글씨만으로도 옛 선비들의 예(禮)와 의(義) 그리고 풍류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다만, 몇몇 바위 글씨는 위치가 모호해 안내표시판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일반인들도 도봉산 트레킹을 하며 탐방할 수 있는 바위 글씨 길이 재정비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안고 하산합니다.

  가을 단풍이 마무리되는 즈음에 다녀온 바위 글씨길 트레킹은 예를 중시하고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과 그 가운데에서도 풍류를 마음껏 즐길 줄 아는 선비들과 함께 한 기분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여러 번 도봉산을 찾아야 하는 이유겠지요?
  땅이 꽁꽁 얼기 전에 도봉산의 오랜 천년 고찰과 불교문화가 남긴 문화유산이 가득한 ‘천년 고찰 길’을 올라볼 예정입니다. 아름답고 신비한 이야기가 가득할 산행이 벌써 기대됩니다. 



<기록, 일러스트 송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