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아카이빙 프로젝트
도봉 아키비스트가 기록하는 도봉의 인물과 공간
지역문화 아카이빙은 도봉이 품은 다양한 문화의 가능성과 지역 자원을 주민이 직접 탐색,
기록하고 구성하여 중요한 홍보 자산으로 공유하는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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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초등학교의 모태, 도봉구의 가장 어르신 학교 서울창동초등학교
이혜경 |2020-11-26 | 조회 1328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되고 그 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다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권의 머리말에 나오는 문장이다.
내게는 ‘창동초등학교’가 그러하다. 그냥 무심히 지나치던 곳이었다. 초등학교 하나가 있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곳이 지금은 내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 보이는 ‘창동초등학교’는 전과 같지 않다.
정문에서 바라본 서울창동초등학교
아파트 숲에 에워싸여 있다. 개교 당시는 인근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을 터인데
1930년 4월 1일생 서울창동초등학교
‘창동초등학교’가 세상에 태어난 날은 1930년 4월 1일이다. 도봉구 최초의 학교로 올해 나이가 90세다. 당시 주소는 도봉구가 아닌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개교 당시 학교명은 ‘창동공립보통학교’였다. 그 이후 1938년 ‘창동심상소학교’, 1941년 ‘창동국민학교’로 변경되었다. 해방 이후 1963년 창동이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서울창동국민학교’가 되었다. 1996년에 ‘서울창동초등학교’로 바뀌었고 그대로 불리고 있다. ‘창동’은 그대로지만 초등교육기관의 명칭은 여러 번 변했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에는 일본 천황의 황국신민으로 키우겠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런 명칭이 해방이 되고도 51년이나 지나서야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바뀌는 과정에서도 저항이 많았다고 한다. 한 번 뿌리 내린 일제 잔재를 없애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인근 초등학교의 모태
‘창동초등학교’는 1934년에 1회 졸업생을 내었고 2019년 2월까지 85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졸업생 누계가 25,952명이다.
도봉구에서 최초로 생긴 학교답게 ‘창동초등학교’는 근처 초등학교의 모태가 된 학교다. 1946년 상계초등학교를 시작으로 도봉초등학교, 방학초등학교, 창도초등학교, 숭미초등학교, 월천초등학교, 창경초등학교, 창일초등학교, 창원초등학교, 2004년 가인초등학교까지 10개의 초등학교가 ‘창동초등학교’에서 분리되어 나갔다.
학교 운동장에서 만난 전쟁과 평화
오가며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다가 학교에 들어가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바라본 학교 건물에서는 90년의 세월을 가늠할 수가 없다. 리모델링도 하고 새로 페인트칠을 하여서인지, 학교 건물은 벤자민 버튼의 거꾸로 가는 시계마냥 몇 년 전보다 어려져 있다. 90세 어르신이 아니라 열 살 안팎 초등학생의 모습이다.
깔끔하게 단장된 모습으로 서 있는 학교 건물
운동장에 서니, 입학식 날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와 앞으로나란히를 하며 줄을 맞추던 아이. 낮잠을 자다 일어나 아침인 줄 알고 가방을 등에 매고 나비처럼 팔랑대며 학교로 가던 아이. 선생님이 치던 풍금 소리에 맞춰 갈래 머리로 박자를 맞추며 종달새마냥 노래를 부르던 아이들 모습이 비눗방울처럼 떠다닌다. 평화롭다.
한참동안 내 눈 앞을 떠다니던 비눗방울들이 요란한 총성과 함께 투두둑 터지며 사라져갔다. 고개를 돌리자 운동장 한 모퉁이에는 겁에 질린 얼굴의 아이들이 숨어 있다. 풍금소리, 노래 소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대포 소리와 대전차가 굴러가는 소리로 가득 차 있다.
1950년 6월 27일 이곳 창동은 그야말로 총성이 난무하던 곳이었다. 한국전쟁 때 의정부 저지선이 무너지자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던 창동으로 북한군이 쳐들어 왔다. 우왕좌왕하던 국군은 몇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창동을 내어 주었다. 다음날인 6월 28일 미아리 방어선도 무너지고 서울이 함락되면서 ‘창동초등학교’는 북한군 수송부대의 거처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불암산에 숨어 유격대로 활약하던 육사 생도들이 ‘창동초등학교’에 거처를 정한 인민군 수송부대를 공격했지만 결국 탈환하지는 못했다.
그 시절을 살지는 않았지만 겁먹은 아이들의 눈길이 떠오른다. 얼마나 가슴을 졸이며 그 시간을 견뎠을까. 전쟁의 기억 중 두렵고 서글프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초등학교 운동장을 채웠을 무기와 총성의 이미지는 유독 공포스럽다. 우리 아이들에게 전쟁의 역사를 다시는 답습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왼쪽 사진 건물은 유치원이다. 학생 수가 감소하면서 빈 교실이 유치원이 되었다.
학교 운동장과 계단에 아이들의 웃음소리만이 가득하기를 바라며 사진을 찍었다.
어둠 속에서 비로소 어깨를 펴는 창동리(倉洞里) 석조 이정표
후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가면 두 개의 석조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양곡 창고가 있었던 창동의 유래를 알려주는 중요한 기념물로 도봉구 향토문화재 제1호다. ‘倉洞里’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대리석 석조는 1995년 새로 만든 것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 낮은 키로 움츠린 듯 서 있는 화강암이 원본 이정표다. 가로 38cm, 높이 73cm, 두께 19cm의 화강암에 '倉洞里'라는 지명이 음각되어 있다. 지금은 마모가 심해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다. 원본 이정표가 마치 창동의 탯줄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옆에 터를 잡은 ‘창동초등학교’도 인근 학교의 모태가 된 것일까.
움츠려 있던 원본 이정표가 피어나는 시각이 있다. 어둠이 내리면 화강암에서 '倉洞里'라는 글씨가 나타난다. 빔으로 쏘아 인위적으로 만든 글씨다. 불빛 속에 환하게 빛나는 이정표는 세월의 고단함을 떨치고 어깨를 펴는 듯 보인다.
창동리 석조 이정표의 낮과 밤
새로 만든 대리석 이정표와 원본인 화강암 이정표가 나란히 있다.
어둠이 내리면 원본 이정표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듯 서서히 살아난다.
우물터에서 길어 올리는 수많은 이야기들
‘창동초등학교’ 정문에서 서쪽을 향해 가면 학교 건물을 끼고 골목이 나타난다. 그 골목의 입구에 지금은 어떤 흔적 하나 없지만 우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물을 길어간 분 중에는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 선생의 며느님도 있었다. 그 며느님이 한학자이자 역사학계의 거두셨던 위당 정인보 선생의 둘째 따님이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창동으로 거처를 옮긴 두 집안이, 1942년 정인보 선생의 둘째 딸 정경완과 홍명희 작가의 둘째 아들 홍기무의 혼인으로 사돈의 연을 맺은 것이다.
우물터의 기억을 정양모 선생의 인터뷰에서 만났다. 정양모 선생은 정인보 선생의 아드님이다. 선생은 집에서 500미터쯤 거리에 우물이 있었고, 누나가 그 우물물을 길으러 다녔다고 회상하셨다. 초등학생이었던 정양모 선생께서 그런 누나가 안쓰러워 같이 물을 긷기도 했다고 한다.
우물이 있었던 길을 어르신 한 분이 걸어가고 계신다.
이곳이 우물터인 것을 어쩌면 알고 계시는 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물은 사라져도 사연은 남아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렇게 두터운 인연의 두 집안도 분단의 비극을 피해갈 수가 없었다. 홍명희 선생은 월북을 했고 사돈인 정인보 선생은 한국전쟁 때 납북이 되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비극이 이 두 집안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참으로 마음 아픈 이야기다.
벽초(碧初)와 위당(爲堂)의 이야기를 하면 가인(街人)과 고하(古下)도 함께 떠올리게 된다. 가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대법원장이신 김병로 선생이시고 고하는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인 송진우 선생이다. 모두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의 감시를 피해 창동으로 오신 분들이다.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창동에서 둥지를 트신 것이다.
두레박을 던져 찰랑찰랑 물을 길어 올리는 우물터답게 이곳에 서면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굴곡진 역사와 일제에 저항하며 창동에 사셨던 인물들 이야기가 끝도 없이 길어 올려진다.
우리가 지킬 가치와 이루어야 할 일들의 이정표를 생각한다
‘창동초등학교’와 그 주변을 거니는 일은 세월의 무게를 간직하고 역사를 견뎌온 사연들을 만나는 일이다. 그 사연들의 두레박들에는 우리나라 근현대사 질곡의 역사들이 출렁대며 길어 올려진다. 그 역사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와 이루어야 할 일들의 이정표를 생각한다.
<기록 이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