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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문화 아카이빙 프로젝트

도봉 아키비스트가 기록하는 도봉의 인물과 공간

지역문화 아카이빙은 도봉이 품은 다양한 문화의 가능성과 지역 자원을 주민이 직접 탐색,
기록하고 구성하여 중요한 홍보 자산으로 공유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도봉구와 주민의 삶을 돌아보다 (1)

정지실 |2020-11-16 | 조회 700

  1. 도봉구 토박이와의 만남


  “도봉구 우이동 189번지..”
  “앗, 선생님. 구 이름이 잘못된 거 아닌가요?”
  “아니야. 그땐 그랬어. 그때는 거기도 도봉구였어.”


도봉구평생교육학습관에서 인터뷰 이후 2020.10.28.

  마을 조사단에서 만난 김희련 선생님 (60대, 여, 도봉구 쌍문동 거주)의 또랑또랑하고 다부진 목소리는 여전하셨다. 예전에 도봉환경교실에서 해설사로 일하고 계셨던 김희련 선생님을 여기서 또 뵙게 된 것이다. 선생님은 힐링캠프 강사, 궁해설사 등으로 봉사와 일을 하시면서 여전히 젊은이 못지않은 활약을 하고 계셨다. 

  선생님은 1963년부터 1983년까지 우이동에 사셨고, 이후 두 번의 이사를 거쳐 현재 도봉구 쌍문동에 거주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나는 선생님이 우이동에 사셨다는 이야기에 당연히 강북구 주민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추측과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그땐 거기도 도봉구였어. 나는 계속 도봉구에 있었던 거야” 

  한 곳에 사시면서 집 주소가 성북구와 도봉구, 강북구로 변하는 과정을 모두 경험하셨던 선생님은 도봉구 변천사의 산증인이었다.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행정구의 변화도 그렇고, 당시 이 지역의 풍경은 어땠을까. 선생님은 그 시절의 기억을 하나씩 나누어 주셨다. 
 
  2. 사람과 집은 그대로인데 소속된 행정명이 바뀌게 된다면?  

  창동, 도봉, 방학, 쌍문 등 현재 도봉구의 지명이 등장한 것은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경이라고 한다. 현재 도봉구와 주변지역은 당시 ‘양주군’과 ‘고양군’ 일대에 속했다가, 해방 후 ‘서울 성북구’로 편입되었다. ‘도봉구’의 등장은 73년의 일이다. 성북구로부터 분리되어 ‘도봉구’가 신설되었다. 이때도 현재의 도봉구는 아니었다. 88년 도봉구에서 노원구가 분리되었고, 95년에는 강북구가 분리되었다. 도봉구 주민들이 한때는 양주 혹은 고양 주민이었다가, 성북, 노원, 강북구민이 되었을지도 모를 긴 사연이다. 

  행정구역은 교통이 발달한 지금도 많은 것들을 가르는 존재다. 행정구역 경계에 따라 우리는 학군, 법원, 세무서, 훈련장, 주민 센터 등을 구별한다. 행정구가 바뀐 후에도 관공서의 소관이 바뀌지 않는 경우도 있어 당하는 입장인 주민에게는 종종 피곤한 일이 되기도 한다. 일상이 달라지지 않아도 마음가짐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름이 영역을 가르는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 우리 지역에 대한 소속감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묘하게도 선생님은 우이동이 도봉구였을 때에 그 곳에 사셨고 관할이 바뀌면서 다시 도봉구 쌍문동으로 이주를 한 까닭에 계속 해서 도봉구민으로 자처할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도봉구 주민인 셈이다. 나아가 선생님은 도봉구 지역에서 태어나셨고, 외가댁이 8대에 걸쳐 대대로 도봉구 지역에서 터를 이어왔기 때문에 더욱 깊은 고향의 향수를 느끼고 계셨다. 
  “자기 그거 알아? 모르지? 고향이 주는 맛, 그 기분...” 
  그래서 선생님은 고향을 결코 떠날 수가 없다고 하신다.  

  3. 기억속의 도봉구
  이 지역에 오래 사셨던 만큼 도봉구의 옛 모습도 많이 간직하고 계실 것 같아 가장 기억에 남는 공간이나 장소를 여쭈어 보았다.  


우이동 집 앞 계성교(현 청담교) 위에 서 있는 세 자매 

  선생님의 어린 시절 집 앞에는 작은 징검다리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징검다리는 나무로 만든 다리로 바뀌었고, 홍수로 그 다리가 떠내려 간 후엔 다시 콘크리트로 만든 돌다리가 생겼다고 하셨다. 그 다리가 현 우이동 청담교다. 주변에는 군부대들이 많았고, 일본인들의 적산가옥도 많이 남아있었다고 기억하셨다. 선생님은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며 하천에서 물고기도 잡고, 하루도 사고를 치지 않는 날이 드물었다고 회상하신다. 

  “어렸을 때 나는 사실 좀 극성맞아 가지고 여름이면 개울가서 물고기 잡다가 홀라당 빠지거나 가을이면 잠자리 잡으러 갔다가 원피스 찢어가지고 나타나고, 겨울에는 남자들 썰매장을 쫓아가서 썰매 타다 물에 빠져 불 앞에서 앞머리를 태우질 않나, 산에 가서 추석 솔 딸 때 뱀을 만나질 않나... 창동 논두렁에서 물 얼려서 스케이트타고 한참을 놀고... 그랬지.”
  
  누렇게 바랜 흑백사진 너머에서도 선생님의 지난 세월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집 앞 돌다리 위에서 다정한 포즈를 잡고 있는 세 자매와 함께, 선생님은 그 시절로 돌아가 유년시절의 꿈을 꾸고 계신 것 같았다. 

  도봉구의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는 동안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도시의 풍경은 알아보기 힘들만큼 달라졌다. 그러나 흑백사진 속 선생님이 서 계신 다리 아래 물길은 지금도 도봉구를 지나고 있으리라. 그뿐인가. ‘도봉구 우이동’ 천방지축 소녀는 오늘도 지역을 위해 분주히 일하시면서 도봉주민으로 살아가신다. 테니스로 다져진 강단 있는 자세로. 

  “나 여기 도봉에서 계속 살거야~ 도봉은 내 평생 고향이거든..”

<기록 정지실>